영성

마르코 복음서(42)

입력일 2006-11-05 수정일 2006-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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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는 ‘구원 희망하는 축제’

최후만찬 통해 제자 사랑 보여줘

2. 최후 만찬 (마르 14, 12~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때를 예감하시고 평소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위해 최후의 만찬을 극진히 준비하신다.

마르코는 특유의 샌드위치 작법을 이용하여 최후 만찬 준비 기사(12~16절) 앞뒤로 유다의 배반(10~11절, 17~21절)에 관한 기사를, 최후 만찬(22~26절) 기사를 유다의 배반(17~21절)과 베드로의 배신 예고(27~31절) 사이에 배치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대조시킨다.

최후 만찬 준비 (12~16절)

무교절 첫날, 곧 목요일인데 그날 오후(유다교 월력으로 니산 14일) 3시경부터 성전에서 파스카(해방절 혹은 과월절) 양을 잡고 해가 진 다음에(니산 15일) 예루살렘 시내에서 파스카 만찬을 먹게 된다. 파스카 식사는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모세를 통한 시나이 계약을 기억하고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는 축제의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고을 안으로 보내며,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나면 그를 따라가서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을 찾아 만찬 준비를 하라고 분부하신다.

이는 앞서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새끼 나귀를 징발하신 것처럼(11, 1~11) 예수님의 전권을 드러내준다.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심 (17~21절)

목요일 저녁 파스카 식사 자리가 마련된다. 축제의 분위기 안에서 친교를 나누는 기쁨의 만찬이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는 음울한 분위기로 펼쳐진다.

배반자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 ‘열둘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배신의 냉혹함을 극대화시킨다. 사람의 아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21절)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 성경 속의 의인들의 고통, 곧 인간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여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반영한다. (시편 41, 10;55, 12~14)

배신자를 두고 하시는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1b절)라는 말씀에서 다시 한번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성찬례 제정 (22~26절

최후 만찬은 정확하게 언제 어떤 모습으로 거행되었을까?

파스카를 기념하는 만찬이라고 보도하는 공관복음서(마태 26, 26~30; 루가 22, 14~20)와 바오로 서간(1코린 11, 23~26)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이별 만찬이라고 보도한다. (요한 13, 1;18, 28;19, 14. 31~34)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실제로는 파스카 하루 전날(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니산달 14일 저녁)에 마지막 만찬을 드셨을 가능성이 높은데, 파스카 축제의 의미와 연결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유충희 신부의 ‘예수의 최후만찬과 초대교회의 성만찬’(우리신학연구소, 1999)을 참조)

전승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최후 만찬기는 마르코 복음서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채록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두 가지 구전 모두 마르코와 바오로가 소속된 교회의 성찬례(미사)의 영향을 받아 윤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최후만찬은 유다교의 친목 잔치와 비슷한데, 유다교의 회식 절차는 전식과 본식, 후식으로 이루어진다.

최후 만찬에서는 전식은 생략되고 본식에 해당되는 식사 장면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시면서 제자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빵은 예수님의 인격과 활동을 포괄하는 상징이 된다.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준 계약(출애 24, 8)과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52, 13~53, 12)를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이제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써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을 만민을 위한 대속죄(代贖罪)적인 죽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25b절)는 말씀에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는 긴박감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잔치에 대한 희망이 예고된다.

마르코는 만찬 장면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의 죄를 없애고 생명을 주는 것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죽음의 잔은 하느님 나라에서 마실 승리의 잔으로 변화될 것이다.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