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0.사회운동가 및 제 3 세계(6)레오나르도 보프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6-10-01 수정일 200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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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열린 개혁 외친 해방신학의 선구자

해방신학 확산시키며 신앙 속 실천 주장

교회와 연계해 저술-교육으로 개혁 활동

“천국이 지상에서 지옥만을 체험한 가난한 이들의 것이 아니라면 나는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그 하느님은 심장이 없는 하느님일 것이다.” - 레오나르도 보프

사회가 요구하는 소명

해방신학은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사상 가장 획기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이견도 물론 있겠지만 해방신학은 세계교회의 그 주변부에서 자생한 최초의 보편적인 신학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콜롬비아 보고타와 메데인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단 총회를 기점으로 공식적이고 보편적인 논의가 이뤄진 해방신학은 이후 10여년간 라틴 아메리카 교회의 사목 활동과 전망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이미 5백여년에 걸친 가혹한 식민지 착취를 경험했고 독립 후에도 군사 독재와 엄청난 빈부격차와 빈곤, 폭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비참한 민중의 현실은 양심적인 사제들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의 구원, 즉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삶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불의한 사회 구조의 개혁 또는 혁명을 동반한 민중 해방을 꿈꾸게 했다. 그것은 시대가 요청하는 예언자적 소명의 한 부분이었다.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 역시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다.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를 비롯해 공의회 문헌들,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해방신학의 주장에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해방신학의 일부 주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비판적이었지만 결코 그것이 해방신학의 취지와 요청에 대한 거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는 흔히 해방신학을 단죄했다고 말해지는 1984년 8월 6일자 ‘해방신학의 일부 특면에 관한 훈령’과 1986년 3월 22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에서도 그 취지에 공감을 표시한다.

1986년의 훈령은 “자유의 신장을 저해하고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여러 장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 강렬한 해방의 열망이 일어나 우리들의 세계를 휩쓸고 있다”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러한 열망을 자신들의 열망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결국 교회는 해방신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해 표시하고 있는 관심과 투신, 그 취지와 문제 의식에 대해서 타당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다만 그 의도와 목적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의 일부 측면에 대해서 비판,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50여권의 관련 저서 집필

바로 그 해방신학을 확산시키고, 라틴 아메리카 교회 안에서 해방신학이 세상을 바라보고, 신앙 속에서 그 주장을 실천하도록 한 대표적인 인물이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이다. 70년대초부터 프란치스코회 사제로 초기의 해방신학운동을 이끈 인물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한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보프 신부는 해방신학에 바탕해 혁명을 위한 지하 정치 투쟁에 투신한 중앙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운동가들과는 달리 교회의 대중 조직과 연계하면서 저술과 교육 등을 통해서 공개적인 개혁 활동을 추구해온 남미 해방신학 운동을 대표하는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남미 지역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던 지역으로 남미의 해방신학을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도한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었으며,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브라질의 휴고 아스만, 멕시코의 호세 미란다. 우루과이의 후안 루이스 세군도, 엘살바도르의 스페인 태생인 혼 소브리노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보프는 한편으로는 사회 운동에,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에 정진하면서 해방신학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무려 50여권의 관련 저서를 집필해냈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1938년 12월 14일 브라질의 산타 카타리나주 콘코르디아에서 이탈리아계 지식인 아버지와 문맹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브라질 페르로폴리스 등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34세에 독일 뮌헨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가난한 민중들의 삶, 그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해방신학 운동에 투신한다. 1984년 교황청은 보프 신부를 소환했다.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1년간의 저술 금지 및 함구령의 조치를 받았다. 이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성명을 내며 항의했고, 교황청은 1986년 제2차 훈령을 발표하고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기도만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물론 해방신학자들은 오늘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해방신학의 유효성에 대해서 자문을 하고 있다. 이들은 그러나 여전히 남미 민중의 삶의 변화가 없는 한 그 유효성은 지속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프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아니라 사회 변혁을 위한 투신에 우리를 초대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라고.

그는 현재 브라질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며 남미의 대표적 해방신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상황에서의 해방신학의 미래를 탐색하고 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