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 수도회 탐방] 도미니코 수도회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4-11-14 수정일 2004-11-14 발행일 2004-11-14 제 2423호 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진리 수호와 설교통한 복음화 사업위해
소공동체 모임 활성화 등에 앞장설 계획
현재 한국 도미니코회의 활동은 각 본당 미사집전 및 강론, 영성지도, 피정지도 등이며 1475년 창립된 평신도 신심단체 「로사리오회」와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 지도 등을 맡고 있다.
1216년 교황 호노리노 3세에 의해 공식 수도회 인정을 받은 도미니코회는 창설자 성 도미니코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사후에도 수세기를 거치며 세계 곳곳에 진리 수호와 설교를 통한 복음화 사업에 헌신했다.

「정통 신앙의 파수꾼」이라는 명칭을 얻었던 도미니코회는 십자군 원정시 군인들에 대한 격려 설교로부터 교회내 도서 검열까지 그만큼 여러 역대 교황들로부터 다방면의 협조 요청과 임무를 부여 받았다. 종교 재판이라 불리는 이단 심문 재판의 재판관도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맡은 경우가 많았다.

성인들이 많이 배출된 수도회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도미니코회는 토마스 아퀴나스, 대(大)알베르토, 교황 비오 2세 등과 함께 일본에서 순교한 16명의 회원과 베트남서 순교한 60명 회원이 각각 시성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인디안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는 바르톨로메 데 카사스도 도미니코회 출신이다.

1587년 도미니코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성 로사리오 관구」를 설립,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하였거나 교회가 뿌리 내리지 못한 지역의 복음화에 매진하게 된다. 처음부터 선교를 지향했던 창설자의 이념이 구체화된 사례이기도 했다.

성 로사리오 관구가 주 활동 대상 지역을 필리핀 및 동양으로 삼았던 점에서 한국 교회와의 인연도 여기서 비롯됐다. 조선 선교를 위해 일본에서 준비중이던 복자 성 도미니코의 요한이 조선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교한 것. 이후 재불 화가로도 유명한 김인중 신부가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게 됨으로써 한국과의 끈이 재개됐다.

한국 교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2년 개최된 도미니코 수도회 아시아 총회를 통해서였다. 성 로사리오 관구를 통해 한국 진출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자 로마본부 책임자가 3개월여에 걸쳐 한국을 순방했고 1987년 열린 아시아 총회에서 한국 선교가 성 로사리오 관구에 공식 위임됐다.

이후 한국 진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서울대교구의 초청을 받아 1990년 한국 교회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도미니코회는 1992년부터 한국인 지원자를 모집하게 되었고 1994년 서울 미아리에서 수도원 축복식을 가졌다.

현재 한국 도미니코회의 활동은 각 본당 미사집전 및 강론, 영성지도, 피정지도 등이며 1475년 창립된 평신도 신심단체 「로사리오회」 지도와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 지도 등을 맡고 있다.

특히 로사리오 신심회는 성 도미니코가 성모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사랑을 말과 모범으로 가르쳤던 것을 모범 삼아 회원 알라노 드 루페(1428~1478)가 1475년 설립한 평신도 신심단체이며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생긴 청년회다.

한국 도미니코회는 앞으로 순회설교, 기도 모임, 평신도 지도자 양성, 소공동체 모임 활성화 등에 주력할 예정이며 도미니코 가족 형성과 로사리오 신심 보급을 주된 활동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한편 도미니코 수도회 가족들로는 1206년 도미니코 성인이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관상수도회와 1280년 설립된 재속회 등이 있다. 도미니코 수도회 전체 회원수는 80여개국 7000여명 정도다.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