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55) 서구 대이교

김상재 기자
입력일 2002-06-16 수정일 2002-06-16 발행일 2002-06-16 제 230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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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열로 교황이 3명 존재
교황 우르바노 6세 아비뇽 귀환 거부하자
추기경단 기득권 상실 … ‘대립 교황’ 선출
현 교황은 몇 대일까? 현 교황청 연감에는 현 교황을 264대로 표기하고 있지만 비오 12세때까지는 비오 12세를 262대로 표기했다. 그러면 현재는 266대가 되어야 한다. 이 같은 혼란은 대립 교황으로 인한 것이었다.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은 비오 12세에 이어 교황에 선출되자 자신의 이름을 요한 23세라고 명명했다. 이는 과거 1410년부터 1415년까지 재위한 대립 교황 요한 23세를 역사적 오류에 의한 합법적 교황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처럼 대립교황의 문제는 아주 오래도록 교회에 상처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서구 대이교 시대의 교황들은 큰 문제가 됐다.

이중선거와 서방교회 분열

아비뇽 시절을 마감하고 돌아온 그레고리오 11세가 귀환 1년만인 1378년 선종하자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 회의인 콘클라베가 73년만에 로마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추기경 16명중 11명이 프랑스인(스페인 1명 이탈리아인 4명)이어서 로마 사람들은 또다시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선출돼 아비뇽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당시까지도 로마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그레고리오 11세도 선종직전 아비뇽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이에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 선출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추기경단은 서둘러 바리(Bari)의 대주교인 프리냐노(Batholomeo Prignano)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1378년 4월 18일 착좌하며 우르바노 6세로 명명한 프리냐노는 추기경이 아니면서 교황이 된 마지막 사람이었다.

아비뇽 교황청 시절부터 강력한 교회 개혁의지를 지녔던 우르바노 6세는 추기경단 쇄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독선적이며 타협할 줄 모르는 군주적 성향을 나타내며 과도한 수단을 사용했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폭언을 퍼부으며 추기경들의 부도덕과 성직매매 사치를 비난했고 추기경들의 아비뇽 귀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 권력지향적이었던 추기경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상실과 교황의 과격한 언행에 대해 불만을 가졌고 급기야 1378년 8월 추기경들은 교황선거가 군중들의 위협으로 이뤄졌으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교황좌가 공석임을 밝혔다. 우르바노 6세는 추기경들이 로마로 돌아오지 않자 9월 17일 29명의 추기경들을 새롭게 임명하여 교황청을 재구성했다. 추기경들은 결국 1378년 9월 나폴리의 폰디에서 제네바의 추기경 로베르(Robert)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했고 10월 31일 글레멘스 7세로 즉위한 그는 로마에 자리를 잡지 못하자 1379년 6월 아비뇽에 교황청을 설립했다. 교황의 이중선거로 교회는 두명의 교황을 갖게됐다. 40년에 이르는 서구 대이교의 시작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지리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둘로 갈라졌다. 영국과 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중부 이탈리아는 로마계 교황을 프랑스와 스페인, 스코틀랜드, 남부 이탈리아는 아비뇽계 교황을 지지했다. 성인들마저 갈라져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로마 교황을 성 꼴레테와 빈첸시오 페리에는 아비뇽 교황을 지지했다. 이러한 분열은 교구와 본당 수도원과 가정에까지 확대됐다. 각 지역 교회는 두 명의 주교, 두 명의 장상과 두 명의 주임신부를 갖게됐고 신자들은 양측 추종자로 분열됐다. 교황들과 그들로부터 임명받은 성직자들은 서로 합법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파문하고 지지자들을 파문했다. 이론적으로는 서유럽의 모든 신자들이 파문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러한 교회 분열은 각각의 교황들이 그들의 후계자를 내면서 더욱 골이 깊어졌다. 정통교황으로 인정되는 로마계는 우르바노 6세 선종 이후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인노첸시오 7세(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1406~1417)로 이어졌고 아비뇽계는 글레멘스 7세에 이어 베네딕도 13세(1394~1417)가 후임 교황이 됐다.

화해 노력과 종식

이러한 분열의 양상 속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파리대학교는 1394년 이교 극복을 위해 사임, 중재 합의, 공의회 등의 세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교황들은 항상 상대방의 사임을 주장했으므로 동반 사임과 중재를 통한 방법으로는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결국 파리대학교는 분규해결의 방법으로 공의회를 제시했는데 1409년 3월 25일 양측 추기경들은 피사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6월 5일 제15회기에서 두 교황은 하니인 성교회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은 그 선언을 배반한 까닭에 이교 및 이단의 으뜸이라고 단죄하여 해임하고 26일 양측 합동선거에서 만장일치로 밀라노의 대주교인 필라르기(Pietro Philarghi)를 알렉산델 5세로 교황에 선출했다.

교회 일치를 위해 공의회 교황이 선출됐지만 두 교황이 사임을 거부하고 공의회 교황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한 교회 안에 세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대립 교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사에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으나 오히려 교황이 세 명이 되는 초유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사진은 피사의 대성당. 종탑으로 세워진 유명한 피사의 사탑이 보인다.
분규는 더욱 심해만 갔고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해졌고 그리스도교 재일치에 관심이 높았던 독일의 시지스문트 황제가 알렉산델 5세의 후계자 요한 23세에게 압력을 가해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로써 교황청의 문제가 세속군주와 공의회로 넘어갔다.

공의회는 교황이 3명이 있던 상황에서 정통 교황이 누구냐하는 고민에 빠지게 됐고 결국 3명의 교황을 모두 퇴진시키고 새 교황을 선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피사계의 요한 23세를 1415년 5월 29일 해임시켰고 로마계의 그레고리오 12세는 1415년 7월 자진 사임했다. 끝까지 사임을 거부한 아비뇽계의 베네딕도 13세는 7월 28일 폐위시키면서 11월에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함으로써 이교가 종식됐다.

이교는 종식됐지만 교황청 분규가 공의회와 세속군주의 개입에 의해 해결됨으로써 교황의 권위가 크게 상처받은 것은 물론이고 이후 대두된 공의회 우위설과 반 교황 운동은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김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