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성당 순례

[수원교구 성당 순례] 손골성지 성당

민경화
입력일 2025-07-22 17:45:46 수정일 2025-07-22 17:57:52 발행일 2025-07-27 제 345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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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만큼이나 깊은 신앙 깃든 곳…더위로 지친 몸과 마음 내려놓다
박해 시대 교우촌 있던 자리, 선교 거점되며 선교사들 본격적으로 머물러

경기 용인시 동천동 손골성지(전담 이재웅 다미아노 신부).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이곳은 박해 시대 당시 교우촌이 있던 자리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속 깊숙이 들어온 신심 깊은 신앙 선조들을 만나기 위해 서양선교사들도 이곳에 머물렀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손골 교우촌을 이렇게 묘사한다.
“마을에서 나와 몇 백 발걸음 어쩌면 천 걸음일지도 모를 거리를 가면 예쁘고 아담한 장소가 있어요…. 거기엔 마침 작은 폭포도 있는데, 높이가 대략 두 자밖에 안 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이 있답니다.”(손골에서 보낸 1853년 9월 18일자 서한) 올 여름, 아름다운 풍경과 신앙선조들의 깊은 신심이 깃듯 손골성지를 방문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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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손골성지는 박해 당시 교우촌이 있던 자리로, 성지 곳곳에 순교자들을 기리는 장소가 위치해 있다. 오메트르 쉼터에서 본 손골성지 전경. 민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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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리 헨리코 신부 동상. 민경화 기자

손골 교우촌 이야기

1865년 9월 29일,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랑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손골에는 오직 신자들만 살고 있었으며, 총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를 통해 병인박해(1866년) 이전부터 손골에 교우촌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이들은 서울 근교의 교우촌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손골 역시 선교의 거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선교사들은 박해를 피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으면서도 신자들과 교류하기 위해 서울 근교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장소로 이곳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1857년이다. 3월, 페롱 신부가 손골 교우촌에 거주했고, 1861년에는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가 머물렀다.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도 1863년 7월부터 약 1년간 손골에서 지냈다. 마지막으로 손골에 도착한 선교사는 1865년 6월 23일에 온 성 도리 헨리코 신부였다.

교우촌 신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는 사실은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도리 신부는 1865년 10월 16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했다.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지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고, 논도 약간 있었지만 홍수로 모두 폐허가 되어 먹을 것을 구하기조차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도리 신부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조선에서 활동 중이던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다. 칼레, 오메트르, 프티니콜라, 위앵 신부 등이 손골을 방문했다. 특히 선교사들은 여름철 농번기 동안 사목 활동을 잠시 쉬고 이곳에서 피정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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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수 있는 순교자들의 길. 민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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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성지 성당 내부. 민경화 기자

순교자 기억하는 공간

도리 신부는 이곳에서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열심히 익히던 중 병인박해를 맞았고 1866년 2월 27일 체포됐다. 당시 조선 관리들은 그를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명했지만, 도리 신부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그는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손골이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도리 신부의 출신 본당 주임이었던 조셉 그를레 신부가 도리 신부의 시복을 위한 여정으로 한국을 찾아 손골을 순례했다. 이후 도리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탈몽(Talmont)과 손골을 연결하기 위해,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화강암 맷돌을 깎아 두 개의 십자가를 제작하고 프랑스와 한국에 각각 세웠다. 이 십자가를 기반으로 손골에는 도리 신부 순교 현양비가 세워졌으며, 1966년에는 손골성지가 공식 설립됐다.

성지 곳곳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장소가 자리하고 있다. 손골기념관에는 오메트르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을 비롯해, 도리 신부가 신학생 시절 집에서 사용하던 침대보와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의 방'에는 성 도리 헨리코, 성 오메트르 베드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그리고 손골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당 뒤편 산기슭에는 손골 교우촌에서 생활하다 순교한 4위 유해를 모신 순교자의 묘가 조성돼 있다.

성지 성당에는 순교자들의 삶과 믿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다.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촌에서 신자들과 함께 지내던 모습을 형상화한 12점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방문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신앙의 울림을 전한다.

성지 전담 이재웅 신부는 지난해 부임 이후 성지 운영위원회와 자문위원단을 새롭게 구성하고, 성지를 영적 쉼터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 너머에 ‘오메트르 쉼터’를 조성해, 성지를 찾는 이들이 차 한잔과 함께 조용한 휴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쉼터는 한쪽 창으로는 성당을, 다른 창으로는 청계산을 바라볼 수 있어, 손골 교우촌이 간직했던 따뜻한 공동체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재웅 신부는 “손골성지가 도시 생활에 지친 신자들에게 제공해야 할 가장 큰 사목적 역할은 바로 ‘영적인 쉼’이라고 생각한다”며, “성지를 찾는 모든 순례객이 마음의 위로와 신앙의 용기를 채워가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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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1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메트르 신부와 도리 신부의 손골 교우촌에서의 생활을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민경화 기자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