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31년 사망, 주교 증거자, 6월 22일 축일)
「아귀따니아」에 살던 한 재판소 소장의 아들 바울리노는 동생의 졸연한 죽음을 보고 또 난지 여드레만에 자기 아들의 죽음을 당한 후에 느낀바 있어 자기 아내와 합의하고 갑자기 속세를 등졌을 때 그는 그 가정과 그 많은 재산 때문에 로마제국의 고위층에 불려가게 되었다. 그의 갓난애기의 죽음을 보고 누군가 『이 적은 피 한방울이 아마 언젠가 하루는 죄인 바울리노와 테라시아를 위해 그들의 구원할 빛이 되리라』고 말했다.
그의 회개가 로마세계에 굉장한 물의를 일으켰다. 바울리노는 「깜빠니아」지방 「놀라」라고 하는 곳에 치명자 성 펠릭스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으나 그의 성덕의 명성은 가장 걸출한 우정을 그의 둘레에 끌어모았다. 모든 것과 담을 쌓고 그는 다만 신자들의 요구만을 듣고 살아갔다. 그리하여 천주의 은자(隱者) 바우리노 보다 더 붙임성 있는 자가 이세상에 없다고 모두들 말했다. 「반달」야만족들이 침입했을 때 그는 참으로 침착한 영웅주의를 보여주었다. 아오스딩은 그의 「천주의 도시」 제1권에 아래와 같이 그를 칭찬하기를 마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그들의 재산을 원수의 손에 닿지 아니하는 곳에 감추어 두기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천주의 의견에 따라 자기재산을 원수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좋아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될까? 「반달」족의 수인(囚人) 우리의 바울리노는 이렇게 했다. 그는 천주께 이러한 기도를 바쳤다. 「주여 나는 나의 금덩어리 때문에 고통을 받지도 않고 나의 은덩어리 때문에 고통을 받지도 않습니다. 나의 모든 재산이 「어디 있는지 당신은 잘 아시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