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는 관면 혼배로 결혼했다. 신자가 아니었던 아내는 결혼 후 제법 오랜 숙고를 통해 신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가까운 본당의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하기로 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사실은 앞집에 사시던 친절한 엘리사벳 아주머니가 아내를 데리고 성당에 가기로 한 덕분이었다. 그분은 우리 구역의 반장님이셨는데 매우 열심한 교우셨다. 빈번한 해외 출장으로 무척 바빴던 나로서는 엘리사벳 반장님의 도움이 다행하고 고마운 일이었기에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랐다.
아내는 직장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고 시간을 내서 교리반에 등록한다는 게 나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심 고마워하고 있던 터였는데 아내는 성당에 가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말았다.
예비신자 교리반이 2주 전에 시작했기에 신부님을 찾아뵙고 현재 사정을 말씀 드렸지만 한마디로 거절하더라는 것. “신부님 제가 보충해 드리면 안 될까요?” 반장님이 말하자 “당신이 뭘 알아?”라고 핀잔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빈정이 상한 아내는 성당에 나 말고도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데 안 가도 될 것 같다며 한사코 성당 가기를 거부하는 태도로 돌변하고 말았다. 자신을 데리고 간 반장님이 너무 무안해 해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는 게 아내의 전언이었다.
그로부터 아내를 영세시키기까지 또 다른 몇 년이 필요했다. 예비신자 교리는 반드시 6개월의 기간을 채워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신 신부님을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신자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열성을 보이며 예비신자를 성당으로 인도한 반장님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듯했다.
간혹 냉담을 하고 있는 교우들 중에 신부님으로부터 상처 입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유도 가지가지, 상황도 여러 가지였지만 신부님들의 신자들에 대한 불친절에 기인하는 경우들이 제법 많았다. 조금만 신자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신자들을 귀하게 여기면 좋으련만, 신자들이 너무 흔해서인지 교우를 막 대하는 신부들이 종종 눈에 띈다. 웬만하면 반말이고 자기 말이 법인 줄 아는 신부도 있다. 본당 사목회장이 비서쯤 되는지 운전기사 부리듯 하는 신부도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신자들 하나하나가 귀한 존재가 되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본당을 꽉 채우던 교우들이 반으로 줄고 청소년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고 성소는 격감하고 있다. 시노드를 통해 터져 나오는 신자들의 요구들이 생경하고 거북하게 들리는 신부들도 많을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쇄신돼야 한다. 신자뿐 아니라 성직자들의 쇄신이 더욱더 절실하다는 의미이다. 성당이 비고 신자들이 귀할 줄 언제 꿈이나 꾸었을까? 성소가 급격히 줄고 평신도들이 조목조목 목소리를 낼 줄 어떻게 알았으랴?
이제라도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신자들 귀한 줄 알고 주님 섬기듯 하면 좋겠다. 정말 그런 교회가 되면 좋겠다. 신자들은 신부님을 너무 가까이에 두려고 하지 말고 너무 멀리 두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신부를 보고 성당에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교회의 특성상 신부의 역할은 너무나 지대하고 독특하다.
“당신이 뭘 알아?”, “글쎄요. 잘 아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죠. 하느님이 모든 걸 아시지 않을까요?” 팬데믹을 겪으며 신자가 귀한 존재가 된 것은 참으로 신의 한 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