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레지오 마리애』창시한 프랭크 더프 옹

편집국 기획부
입력일 2020-12-04 14:18:27 수정일 2020-12-04 14:18:27 발행일 1989-11-05 제 167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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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자비의 성모회」로 활동시작
성모통해 온전히 헌신할것 강조
금년6월 탄신1백주…국경초월해 복음화 활동펼쳐

백 년 전에 태어난 한 사람의 일생동안의 업적이 오늘날에도 열매를 맺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의 창시자인 아일랜드 출신의 프랭크 더프(Frank Duff)는 많은 평신도들에게 복음화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그들의 사명을 깨닫게 해주었다.

프랭크 더프가 살아있다면 1989년 6월 7일에 백 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그에게 91년이란 긴 생애를 선물로 주셨고, 마지막 날까지 능동적이며 축복받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셨다. 그의 일생은 공간적으로는 아일랜드와 그 수도에 국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은 세계로 뻗어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에게 조언과 영적 도움을 구했고, 그는 또 각 대륙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의 신자들로 부터 편지를 받고, 그들의 문제에 관해서 아주 상세한 답장을 써 보냈다. 그와 서로 연락한 사람들이나 그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고위 성직자·젊은이·노인 등 다양했다. 왜냐하면 그가 세운, 그리고 온 힘을 기울인 레지오 마리애가 세계 어디서나 복음화를 위해서 가장 힘 있는 도구였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후에 이 눈에 띄지 않는, 겸손한 평신도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제4회기 때 평신도 참관인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그가 공의회의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추기경 한분이 그의 입장을 소리 내어 알렸고, 공의회교부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이런 일은 공의회 사상 결코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다. 대부분 주교들은 그를 개인적으로 알던지 또는 그의 활동 때문에 그를 알고 있었다.

프랭크 더프의 생애를 간단히 요약하면 그는 1889년 6월 7일 더블린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친은 공무원이었으며, 더프 자신도 나중에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1980년 11월7일 더블린에서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 위한 사랑

다른 7일이 또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날짜였다. 즉 1921년 9월 7일 저녁이 레지오 마리애가 태어난 날이었다. 그날 성모마리아상 주위에 모여 있던 젊은 여인들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때 빈민촌에서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고 이 일에 대해 보고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매주 서로 만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 이 모임의 이름을 「자비의 성모회」라 칭하였고, 본당 보좌신부가 그들을 영적으로 지도해주었다.

프랭크 더프도 규칙적으로 이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는 그가 이 어린 단체의 창시자였기 때문이었다. 3개월이 지난 후 그는 그의 젊은 회원들에게 이제 이 성모회는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성모회가 넓은 세상 밖으로 전파되기 전에 하느님의 섭리는 이 작은 모임이 먼저 윤락녀들을 돌보도록 이끌어 주셨다.

사람들은 윤락녀들의 죄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랭크 더프는 길을 잘못 들어 하느님을 멀리한 불명의 영혼을 구하고자 했다. 그는 몇몇 단원들과 함께 신앙의 정신으로 인내로운 대화를 계속하였고, 그 가운데 회개할 뜻이 있는 사람에게 3일간의 피정을 주선해 주며 이 피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도록 도와주셨다.

그 당시는 더블린에서 방을 구하기가 무척 힘든 때였는데 정부로부터 퇴락한 집 한 채를 간신히 얻어 가구를 들여놓고, 회개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집을「성마리아의 집」이라 불렀다. 이집에서 봉사할 사람들이 새로 모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두 번째 그룹을 탄생 시킨 것이다.

윤락녀 새 삶 인도

이 훌륭한 첫 고기잡이에서 23명의 윤락녀들을 구출하자 더프는 더블린의 모든 윤락녀들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은 모든 하숙집을 다 찾아다니며 거기 살고 있는 윤락녀들과 우정 어린 접촉을 계속하며 그들이 생활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이 초인간적인 목표는 오직 신앙의 정신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이 더 많은 회원들을 얻게 해주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자 드디어 「자비의 성모회」의 3번째 그룹이 생겨났다.

이제 막 피어오른 성모회는 곧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원래 창녀들의 온 상지가 되고 있는 슬럼가 까지도 찾아 들어가야 하는가?』하는 문제였다. 많은 회원들이 이를 극구 반대했다. 점잖은 사람은 아예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었다. 경찰도 이를 터부시해서 피하는 지경이었다. 이 지역의 법은 잔인한 폭력뿐이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사람들과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더프는 결정을 내렸다. 즉 이것은 불멸의 영혼에 관한 문제이므로, 이것이 자기 인생의 헌신이고 성모회의 존재 이유이므로 비싼 대가를 치루더라도 과감히 시도하기로 했다.

슬럼가 방문전개

그때부터 프랭크 더프는 동료들과 함께 규칙적으로 슬럼가를 방문했다. 보통 한주에 두 번 정도 방문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들을 냉대했으나 차츰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 영웅적인 노력의 결과로 2년 후에는 모든 범죄의 소굴이 사라지게 되었다.

프랭크 더프는 사도직 가운데서 등한시 되었던 문제를 곧 깨닫게 되었다. 즉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보았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더 많은 집들을 마련하여 그들에게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버려진 건물들을 사용하도록 내 주었고, 더프는 후원자들과 함께 소외된 남자들을 위한 집도 하나 마련하게 되었다(1927년). 이 남자들을 돌보아 주기위해서 남성 봉사자들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첫 남자 단원들이었다. 더프 자신도 정부의 고위 공직자로서 근무를 마친 후 저녁이나 밤에 솔선해서 봉사 활동을 계속했다. 3년 후에는 미혼모들과 그 아이들을 위한 집, 그리고 혼자 사는 여자들을 위한 집도 세우게 되었다. 이 모든 집에서 단원들은 무료로 봉사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어떤 사람들을 자유 시간에 하느님에게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자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봉사했다.

레지오로 개명

1925년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는데 이것이 이 공동체의 장래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4개의 공동체가 있었는데 더프는 이제 중앙협의회를 만들어 신앙의 정신과 실제적 활동에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적당한 명칭도 찾아야 했다. 여러 가지 이름이 제안되었으나 모두 버려지고 더프의 제안인 레지오 마리애까지 채택되지 못했다. 더프는 인내로써 다른 사람들의 뜻에 따라 양보했다. 이것은 그의 특징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다음번 모임에서 이 문제가 다시 토론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더프의 의견에 모두 찬성해서 「레지오 마리애」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국경 초월해 활동

이 공동체가 그들의 조직 형태와 새 이름을 얻자마자 더블린 밖에, 그리고 아일랜드의 국경을 넘어서 하나씩 새 그룹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레지오가 모든 대륙에 계속 퍼져나갔다. 프랭크 더프는 새로 생긴 가지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무둥치와의 살아있는 연결을 갖게 했고, 그들 모임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이 세계적 전파가 이루어지자 프랭크 더프는 규칙과 관행들을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레지오 마리애 교본이 생겨났으며 그 안에는 정신적 기초들·활동방법·조직형태 및 활동체 안들이 들어있다. 물론 그 교본이 요구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힘들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교본에는 이상적 모습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레지오 마리애의 초상화」라고 더프는 항상 강조했다.

레지오가 전파됨에 따라 교본은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단원들의 교육과 조직의 건설에 기초로 사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후에도 레지오는 수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발전하여 성장했다. 특히 아프리카·남미·그리고 아시아의 몇 나라들(필리핀ㆍ한국 그리고 박해받기 전까지의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 모든 나라의 레지오와 더프는 편지와 방문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동료들은 그가 적어도 십 만 통의 편지는 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희생과 용기 강조

프랭크 더프의 거의 초인적인 활동은 그의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다른 한편 그는 다른 사람을 이끄는 능력을, 또 그들의 재주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큰일을 말기는 지도자적 재능도 갖고 있었다. 그는 레지오 활동에 희생정신과 과감히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 했다.그 자신도 항상 다시금 새로운 사도직 방법을 시도했다.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증언을 전해줄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예컨대 「거리의 사도직」 또는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외국으로 파견)」 등이다.

그는 레지오 본부에 부탁하여 젊고 능력 있는 단원을 레지오의 사자(使者)로서 먼 나라에 파견하도록 했다. 그는 그 나라의 주교의 뜻에 따라 사도적 평신도 운동을 건설하고자했다. 레지오가 요구하는 높은 헌신이 각 사람이 가진 은총의 선물을 완전히 개화시켜 준다고 더프는 확신하고 있었다. 또 이것이 자기의 체험이기도 했다.

프랭크 더프는 그의 긴 일생의 대부분을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께 온전히 바치며 살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재능이 있었고, 명확하고 날카로운 이성과 강한 의지 그리고 강인한 육체를 지녔으므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몰두하는데 습관이 되어있었다. 이런 헌신적 생활이 그의 자연적 재능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들어 올렸다. 그는 온전한 헌신은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레지오는 마리아께 봉사하는데 「가장 큰 헌신」이며 이를 통해 그녀의 아들 예수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통한 헌신

더프에게는 이 교리가 쉽게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3년 동안이나 그는 이 교리를 공부했다. 온전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은 주님의 어머니가 구세사 안에 어떤 위치를 가졌는가를 알게 되었을 때였다. 이 새로운 깨달음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비록 그가 이미 몇 년 전부터 사도적으로 자선활동을 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경본까지 읽었으나, 이 확신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이 교리를 두고 잦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렇게 영신적으로 뜻을 같이한 젊은이들이 1921년 9월 7일 레지오 마리애를 탄생시킨 것이다. 온전한 헌신안의 생활은 영웅적인 행동도 할 수 있게 했다. 또 이것이 점점 더 필요한 것이 되었다.

온전한 헌신은 레지오 마리애의 기초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이 레지오의 힘으로 멀리 낯선 나라에까지 파견된 단원들은 거기서 새로운 레지오를 세웠다. 중국 베트남·케냐·자이레 등에서는 순교의 은총까지 받을 수 있었다.

평신도과제 제시

프랭크 더프는 한걸음, 한걸음 자기의 소명에 충실하며 살았고, 그의 활동은 1980년 11월 7일 죽기까지 중단되지 않았다. 교황은 조문 전보를 보내어 그의 일생의 업적을 기렸다. 『그가 세운 「레지오 마리애」는 수많은 가톨릭 평신도들에게 전교와 성화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과제를 깨닫도록 해주었으며, 이 과업을 열성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이행하도록 해주었다』그가 죽은 후 곧 그의 시복식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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