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개화기 전교자유의 획득과정] 강연초

입력일 2020-06-04 15:41:48 수정일 2020-06-04 15:41:48 발행일 1989-04-16 제 165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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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조약이 종교자유토대 마련
박해중 관심사는 종교자유
교황청、 빠리외전에 한국선교 위임
불공사、 조약에 「종교자유」조항삽입
한국교회사 공개대학을 열어 신자들에게 교회사에 대한 인식을 높여온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ㆍ최석우 신부)는 회보 「교회와 역사」를 통해 공개대학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다음은 「교회와 역사」1백65호에 실린 발표문중 차기진(교회사 연구소 책임연구원)씨의 「개화기 전교자유의 획득과정」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개회기는 대체로 1876년 개항으로부터 1910년 한일국치까지、문자 그대로 한국사에 있어 대전환기를 일컫는다.

본 주제와 관련된 시기는 그중에서도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는 시기에서 1904년 「선교조약」이 체결되는 시기까지 20여년에 주로 한정된다.

이 기간 동안에 한국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염원해 온 박해의 극복과 전교의 자유가 이루어지게 된다.

흔히 조선사회는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서 그 실체가 이해되어 왔다. 성리학의 영향은 크게 정신적인 면、사회 윤리적인 면、정치 대외적인 면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특히 외래 종교인 천주교가 확산되어 가던 조선후기를 놓고 본다면 이 모든 면이 복합、발전하여 마침내는「위정척사」의 양상으로 변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보다 근대 지향적인 성향을 띠고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룸으로써 봉건체제로부터 탈피해야 하겠다는 의식을 표방한 것이 「개화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을 갖춘 인사들은 개화를 외세에 의존하였고、 그 결과 민족 내지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소홀하였다는 일부 지적과 함께 목표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일찌기 1860년에 창도된 「동학」은 1890년대에 이르러 민중의 성향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반봉건 내지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성격으로 변모하게 되었는데、이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세 경향이 한국근대사회 주된 흐름이었으나 이들이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림으로써 개화기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라는 궤적을 달리게 되었다.

천주교 측에서 획득한 전교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후 신자들에게 있어 종교자유의 문제는 항상 주된 관심사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박청고」(大舶請顧)사건도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물론 천주교신자가 서양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한 현실부정의 모반사건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천주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교사의 영입과 종교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1831년 교황청은 조선교회의 선교사 영입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조선교구를 창설함과 동시에 이를 빠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교황청이 만일 조선정부에 직접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다면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박해가 더욱 심각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교구 설정이후에도 박해는 계속되었고 1839년 기해박해 결과 프랑스 선교사가 순교함으로써 박해의 종식은 프랑스와 조선이라는 국가사이의 문제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한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은 오히려 쇄국의 강화와 척사위정의 고조라는 결과만 낳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입국은 계속되었다.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은 구미 각 국과 통상조약을 잇달아 체결하기 시작했으며 북경의 프랑스 공사와 조선의 선교사들도 이에 힘입어 적극적인 교섭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프랑스 공사는 다른 구미 각국과 달리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조항을 조약안에 삽입하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갖고 있었다.

프랑스측의 이러한 태도는 물론 자국의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어왔고 순교를 거듭해왔다는 배경이 있는 것이었지만 조선신자들에게는 그들의 오랜 염원을 해결해주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1886년 조인된 「한불조약」의 내용은 주로 1883년에 조인된 「한영조약」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만 그것과 다른 점은 제9관의 내용이었다.

즉 「한영조약」제9관에 「양 국민이 왕래하여 언어문자ㆍ격치ㆍ기예 등을 학습하는데…」라고 한 내용 중 「학습」이란 말 다음에 「혹교회(或敎誨)」라는 3자를 추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이 내용은 제4관6조에 있는 「호조(내지 여행증명서)를 소지하면 오락이나 상업을 목적으로 조선내지를 여행할 수 있다」라는 조항과 결부되어 선교사들의 내지여행과 「교회」(전교행위)를 허락한 것이 되었다.

비록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아닌 「전교의 자유」에만 그친 조약의 조인이었을지라도 이것은 오랫동안 박해 속에서 지내온 조선신자들과 선교사들에 있어서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같은 조약 내용 가운데 들어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은 이제 선교사들을 제지하거나 추방할 수는 있었지만 결코 그들을 살해할 수 없다는 「법률적 박해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전교의 대상이 되는 조선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전교의 자유는 곧 「종교의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