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정약용은 배교ㆍ참회한 신앙인”-서거 150주년 추모미사 중 최석우 신부 강론

입력일 2019-12-22 13:39:32 수정일 2019-12-22 13:39:32 발행일 1986-04-27 제 1503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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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사상은 종교적인 신 

고백ㆍ영성체 후 죽음 맞아 
강요된 배교였으나 유배 중 신앙 찾아
조선시대 후기 실학의 대가 차산(茶山) 정약용(요한)선생이 천주교신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최근 그의 서거 1백 50주년을 맞아 다시 거론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4월 7일 다산선생 서거 1백 50주년을 맞아 명동대성당에서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추모미사를 거행, 박해→배교→유배→그리고 다시 신앙인으로 살다간 그의 생애를 처음으로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다음은 다산서거 1백 50주년 추모미사 중 천주교

인으로서의 다산의 신앙생활을 비롯, 당대의 대 신학자인 다산의 사상과 천주교사상, 그리고 다산에게 있어 신앙과 사상이 갖는 의미를 중심으로 한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의「차산(茶山)과 천주교」에 대한 특별강론을 간추린 것이다.

⊙천주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

다산 정약용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던 바로 그 해 봄 이벽의 설독으로 입교를 결심했다. 같은 해 가을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세자를 세례명으로 영세를 했는데 대부는 권일신이었다. 이때부터 다산은 아주 열심히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일에도 적극 참여했다.

1795년 한국 땅에 들어와 전교하던 주문모 신부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치적 당쟁으로 발전하자 10여 년간 계속된 다산의 열심은 배교로 바뀌게 된다. 당시 반대파들은 이 사건의 책임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에

게 전가시켰고 그들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조는 이 세 사람을 좌천시킬 수밖에 없었다.

유배지에서 자신이 천주교 신자였음을 속죄하기 위해 교회 신자들을 괴롭힌 다산은 다시 서울로 불러왔지만 자신의 배교를 명백히 하기위해 1797년 이른바「변명서」「자명서」를 임금께 올린다.

1801년 신유대박해가 나자 이번에는 법정에서 완전히 천주교를 배신하고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강진으로 유배생활을 가게 된다. 18년까지 이어진 이 유배생활 중 다산의 마음속엔 신앙이 되살아나기 시작, 1811년 성직자를 모셔오기 위해 밀사를 북경으로 파견할 때 유배지에서였지만 교회재건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다산이 완전히 신앙생활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교회측 기록에 의하면 유배지에서 돌아온 2~3년 후 1821~2년경이다. 이때 다산의 신앙생활은 묵상과 고행이 연속되는 철두철미한 운동생활이었으며 자기 몸에 쇠사슬을 감는 고행까지 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22년 회갑을 맞아 앞으로 자기가 묻힐 묘비명을 준비하면서 다산은『평생 동안 지은 죄가 많아 가슴속에 후회스러움이 가득하다.

다시 태어날 것과 마찬가지로 아침 저녁으로 성찰하는데 힘쓰고 하늘이 내려주신 성품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간다 하더라고 큰 잘못은 없으리라』는 말을 남겼다. 완전히 참회하고 교회로 돌아온 다산의 참회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다산은 묵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미신행위를 배척하며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종교적인 저술을 남기는 한편 당시 천주교와 관련된 사건ㆍ인물 등을 중심으로 재정리, 「조선천주교회 초기교회사」(조선복음 전래사)를 기술한다.

34년~35년경 다산은 한국에 들어와 활동 중이던 유방제신부로부터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받고 36년 신자답게 숨을 거둔다.

⊙다산의 천주교사상과 그의 신앙 및 사상이 갖는 의미

다산의 신관(神觀) 즉 상제(上帝)에 대한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제(上帝)를 하나의 철학적인 신이 아닌 종교적인 신으로 신앙인의 모습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다산은 자신의 저술에 그렇게 상제(上帝)이야기를 하면서도 상제(上帝)가 곧 천주(天主)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천주(天主)가 아니라고 이야기

도 하지 않고 있다. 만일 다산이 그의 저술에 천주(天主)라는 말을 썼더라면 그 많은 저술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년에 자기의 종교적 확신을 따른 종교적 저술을 했고 그것을 꼭 자기집안에 맡겨 비밀리에 후세에 전하려했다. 1850년 다블뤼 안 주교는 그 집안에서 이 저술들을 찾아낼 수 있었으나 그 후 이어진 박해 속에 일부는 썩어 없어지고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으며 단지 앞으로 발견되기를 바랄뿐이다.

상제(上帝)에 대한 다산의 사상, 저술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는 귀절이 한군데도 없다는 점, 그리고 다산의 만년 즉 신앙생활이 기록된 달레교회사가 외국인 선교사가 남긴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어떤 학자들은 다산이 천주교신자가 아니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기록에 대한 연구자세가 부족한 것과 또는 편견ㆍ선입견에서 나온 발상에 불과하다.

다산은 위대한 유학자이자 실학자다. 그러나 교회 측에서 볼 때 다산은 참된 참회자이다. 모범적인 신앙으로 자신의 배교를 속죄한 진정한 속죄자이다. 다산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다산은 비록 배교하고 천주교를 해쳤지만 그 배교는 외적인 배교일 뿐 내적인 배교가 아니며 그의 마음 안에는 늘 신앙이 살아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배교는 강요된 배교요 강요된 선택이었지만 그가 만년에 다시 신을 찾은 것은 강요된 선택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이었다.

다산은 모든 종교는 대등한 위치에서 만나고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실천한 참된 유학자인 동시에 참된 천주교 신자라 할 수 있다. 물론 다산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제사문제였다.

그러나 다산은 제사금지는 부당하다고 생각, 언제나 제사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미신적이고 허례적인 성격을 띈 것은 제사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 이를 배격했다. 제사의 본 의미, 상징적인 의식을 강조하고 미신적ㆍ허례적 성격을 배격한 다산에게 있어 제사는 종교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제사문제로 다산의 유교와 천주교의 공존성을 부정할 수는 분명히 없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다산을 추모해야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