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종교탄압이 자행된 끝에 종교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할 것으로 믿어져왔던 북한에 5천명이상의 개신교신자와 7백명의 천주교신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종교정책 분석을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정권에 의해 통제되는, 이른바「관제신자」여부를 확인함에 앞서 그곳에도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들이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충격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김일성주의를 철저히 신봉하는「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감으로 가슴을 설레이고 있다.
그러나 날 한의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의 신앙형제들을 만나거나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장밋빛 꿈을 꾸기에 앞서 몇 가지 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공동된 지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북한정권의 종교정책을 분석하는 일과 이를 바탕으로 효과적인 선교정책을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분열돼 서로 싸워온 한민족의 화해에 한국교회가 얼마나 이바지해 왔는가도 성찰해야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북한의 종교정책은 소련이나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의 종교정책과 근본적인 면에서는 비슷하나 크게 나누어 두가지면에서 달리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공산화시초부터 종교인구 구성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극히 낮은 점이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주의라고 하는 개인우상 숭배사상이하나의 신앙 체계를 형성, 주민들이 그 신자화 됐다는 점이다.
마르크스ㆍ레닌의 종교관을 그대로 답습한 김일성은『종교는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의 수중에 장악되어 인민을 기만하고 착취 억압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왔으며 제국주의자들이 후진국가의 인민들을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었다』고 전제하고『예수를 믿는 것은 본질에 있어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 천주교를 비롯한 그리스도교를 말살대상으로 규정했다.
이 같은 기본방침에 따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해방당시 5만명의 천주교신자와 10만명의 개신교신자 및 20만명이상 되는 천도교신자와 50만이 넘는 불교신자 등 전인구의10%도 채 안 되는 각 종교 신자들을 별 저항 없이 신속하게 말살시킬 수 있었다. 50년대 말과 60년대 초까지「김 신부 사건」이나「원산 십자가사건」, 가톨릭신자들의 지하반공단체인「유엔 부흥단」의 저항운동소식이 간간히 들려왔으나 북한에서는 60년대 이후부터 종교는 정권의 정책수립과 사회체제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게 되었다.
전국민의 90%이상이 천주교신자인 폴란드나 절반이상이 러시아 정교 등 각종ㄱ신자인 소련 등에서 보여 지는 정권과 종교 세력들 사이의「파워 게임」같은 현상은 북한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점이 북한의 종교 상태를 더욱 암울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
마르크스주의는 그것과 대비되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하나의 신념체계, 곧 신앙을 형성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상국가의 도래에 대한 확신은 거의 종교적인 신앙에 가깝다. 그리스도이들이 갖고 있는 현세와 내세의 구원관에 대비시킬 수 있을 정도이다.
김일성이 메시아
북한의 경우는 이 사회주의 이상국가의 도래라는 절대 절명의 과업위에 김일성이라는「메시아」가 등장함으로써 한층 견고한 신앙체계가 형성된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곧 김일성주의이며 구체화된 것이 주체사상이다.
학자들은 오늘날 북한의 이데올로기적인 정치체계는 엄격히 말해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며, 그것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와 개인숭배사상이 가미된「특수한 공산주의」형태를 띠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특수한 신종 공산주의는 주체사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현실사회에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주체사상이란 말 그대로 자기의존사상이다. 60년대 이후 중소이념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등거리외교의 합리화와 김일성정권의 고착화를 위해 창안된 이주체사상은 오늘날 북한에서는 그것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철학으로 가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체사상은 이론적ㆍ이념적인 토대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심지어 인류문명은 한반도에서 기원되었으며 한민족은 모든 압제받는 인민들을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진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70년대 중반이후 몇 가지 새로운 종교정책을 펴오고 있다. 첫 번째 것은 국제적인 종교모임에 조선기록교연맹이라는 어용 관제종교단체를 파견, 정치선전화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1974년 8월 2일 세계교회협의회 (WㆍCㆍC)에 회원 가입신청서를 제출한 이래 1975년 인도에서 개최된 아시아 기독교평화회의, 1976년 체코에서 개최된 기독교평화회의, 1980년대 비엔나에서 개최된「조국통일을 위한 해외 기독자회의」제1차 모임과 헬싱키의 2차 모임 및 비엔나의 3차 모임 등에서 기독교연맹으로 하여금 대남비방 결의문을 채택케 하였다.
북한의 이 같은 국제종교회의에의 참석은 국제사회에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한편 외교 전략상 한국을 궁지에 모는 2중 효과를 노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다른 정책은 재미교포들의 북한 방문 시 가정예배를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북한의 목사와 교포목사들과의 교류를 꾀한 점을 들 수 있다.
이 두 번째 정책은 북한의 대외 이미지개선에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교포학자들과 목사들은 북한의 기독교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북한에도 제한적이나마 소수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공식적으로 영됐고 이에 따라 세계교회협의회나 미국교회협의회 등 여러 나라의 개신교단체에서 북한의 종교 실정을「우호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가정예배 등 허용
김일성 유일 신앙만 자리 잡고 있는 북한에 가정예배를 비롯한 일련의 기독교 신앙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한 까닭은 손해보다는 득이 많다는 현실적인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신헌법 54조에서와 같이 반 종교억압 정책을 법적으로 보장받은 시점에서 성분조사 작업등으로 하위그룹에 분류됐던 그리스 독신자들의 지위와 종교자유를 양성화, 일부 허용한 다해서 그것이 확산될 염려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가톨릭과의 점촉이다. 북한은 1987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비동맹각료회의에 업저버 자격으로 바티칸이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성청은 고위성직자와 한국의 장익 신부를 북한에 대표로 파견했다.
또 88년 3월에는 바티깐의요청으로 북한인 6명이 성청을 신자로서 미사에 참석키도 했다.
이어 북한은 로마 올바노대학에 유학생을 2명 파견하기에 이르고 있다. 88년 6월 30일 평양에서 이른바「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됐다고 지난 2일 평양방송은 보도했다.
그동안 조선기독교 연맹산하에 있던 천주교신자들은 이로써 독립된 천주교단체에 소속케 됐다.
한편 이 방송은「천주교인협회」가 △천주교인들의 신앙의자유와 교인간의 연합을 도모하며 △세계 천주교인 및 단체들과의 친선관계발전을 사명으로 결성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방송은『지난 시기 북한에는 천주교인들의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천주교인들을 대변하는데서나 교회의 발전을 이룩하며 각국의 천주교인 및 단체들과 연대하고 친선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일정한 제한성이 있었다』고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인 종교 활동 보다는 남북한 문제에 천주교의 영향력을 중시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84년 북한선교시작
한국 천주교회의 대북한선교는 1984년 2백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북한선교부의 결성으로 부터 시작됐다. 북한 선교부는 곧 주교회의 산하 북한선교위원회 (담당ㆍ이동호 아빠스)로 개칭됐으며「북한선교」등의 소책자를 발간하는 등 북한선교를 위한 기초 작업을 추진해 왔다. 특히 북한선교위원회는 지난 88년 5월 21일 산하기구인 통일사목연구소 (소장ㆍ김성태 신부)를 설치, 북한선교를 민족통일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의 북한선교활동은 미진하다는 비판도 교회일각에서 일고 있다.
구체적으로 평양교구를 비롯 함흥교구ㆍ덕원면속구의 교구장은 임명돼 있으나 실질적으로 침묵의 교회를 위해 활동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매년6월 마지막 주일「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간단한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북한선교가 연례 행사화 돼 간다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통일과 연관된 선교를
이와 함께 한구천주교회의「통일사목」부재현상의 지적도 대두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 그동안 한민족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데「일익」을 담당한 것이 아니냐는 자성 (自省)논리에 입각한 강한 비판도 대두하고 있다.
지난 5월 21일 통일사목연구소 창립기념세미나에서「민족통일에 관한 사목적 연구의 과제」를 주제로 발표에 나선 크리스찬 사상 연구소 양한모 소장은『그동안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은 한반도의 통일을 추구하기보다는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고수하기위해 분단도 불사하는 분단이데올로기를』이라며『교회역시 통일을 향한 신앙과 신학 작업을 하기보다는 분단을 영구화해나가는 신앙과 분단의 신학을 수용하는 과오를 법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앞으로의 북한선교는 민족통일과 깊은 연관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보다 체계적인 통일사목이 수립되기 위해서는▲북한의 종교정책은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교회재건의 방향을 설정해야하며▲국내외의 공산권전문연구소와 유대를 맺고 북한사회에 대한 각종정보와 자료를 수집, 분석해야하고▲북한사회를 이해하기 위하여 통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북산선교에 적용하여야하며▲성서적 견지에서 통일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는「민족통일신학」을 정립해야하며▲민족일치를 향한 사목적 방향을 제시하고 교회 안에서 민족일치를 저해할 수 있는 제반 요소를 극복하며 신자들 사이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 내 공산권연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외에 노태우대통령의「7ㆍ7」선언에서 보듯이 장차 남북한 간의 인적교류 및 학술교류 등 다양한 차원의 교류가 예상되므로 북한에 한국의 사제들을 파견할 수 잇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일선선교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의 양성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닌 것으로 보여 진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한국천주교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천주교신자들의 통일에의 실천의지이다. 『10년, 20년 후의 우리후손들이「그때 당신들은 분단된 민족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였는가」고 물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라는 이동호 아빠스의 당부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