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두 아들(국민학생)이 심하게 싸우는 것 때문에 나와 의논을 했던 한 어머니가 있었다.
아이들은 다투면서 크는게 아니냐는 내 말에 그 어머니는 한숨부터 쉬었다.
동생과 나누어 먹으라고 하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다 먹어 치우는 큰 아들이다. 작아진 옷을 동생에게 주면 입고 있는 옷도 벗어 놓으라고 떼를 쓴다. 큰 아이의 말에 의하면 엄마와 아빠는 아우만 귀여워 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 그럴리가 없어도 아이에게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거든요』
그러나 내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고 그 때 그 엄마는 조상 탓과도 비슷한 그런 원망과 푸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입장이 아닌, 아이들의 입장에있는「영아」와 요즘 자매간의 갈등을 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너는 언니이면서 그 모양이냐?』매사에 언니이기 때문에 동생에게 양보해야되고, 동생보다 완전해야 한다는 엄마(부모)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선생님, 지금 동생은 저보다 한 학년이 늦으니까 작년에는 제가 동생과 같은 학년이었는데도 그때도 역시 너는 언니니까 였거든요. 저는 항상 언니이고 동생은 제 나이가 되어도 역시 동생이라는 얘기죠. 언니다운 건 어떤 거지요?』
영아는 내게 말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태도로 일관했다. 사례를 들어가면서 한바탕 항의 (?)라도 하고나면 좀 후련해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경험하고 있으면 내말이 다 옳다는걸 당신도 확실히 인정하고 있지않소」하는 눈초리와 어투가 되어 갔다.
『그럼 영아는 언니가 아니란 말야?』
나도 질세라 명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항의(?)했다. 그리고는 틈을 비집고 들어선 김에 얘기를 했다. 언니와 아우,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 영아네가 아닌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입장을 지키면서 좀 길게 얘기했다.
『계산해서 답을 얻어내는 그런 방법은 아니라는걸 영아도 안다고 지금 말했다. 한 부모로부터 몸을 받고 태어난거야. 너무나 자명한 이 사실은 가끔 잊을 때가 있지. 나는 나, 너는 너, 이런 게 정확한 논리일까?』
그리고 영아에게 자기가 엄마라면 단둘뿐인 딸, 자매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또 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고 했다.
동생은 늘 언니가 입었던 작아진 옷을 입고, 아무리 세월이 가도, 그래서 언니만큼(지금의) 나이가 들어도 동생이라는 것. 언니한테 함부로 대들지도 못한다는 것. 늦도록 공부하는 언니방으로 간식거리를 날라다 주어야 하는거며(영아는 이때 노크를 안하는 동생을 나무란 것 같다). 불편한 일들이 더 많다는걸 알아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핵가족이니 산아제한이니 하는 이 시대에 너댓명의 가족이 살면서 잘화합하지 못하는 이런 가정이야말로 결손가정이 아닐까. 아이들은 가끔씩 절대적인 존재라는 애정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겐 기성세대간의 화합과 단결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아이들은 보고 닮기 마련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