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박광용 의원 북한·장충성당 방문기

입력일 2019-04-11 17:25:26 수정일 2019-04-11 17:25:26 발행일 1991-05-12 제 175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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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기경 뵙고싶다” 신자들 울먹여

사제지망 50대 평신도 예절 주례
“북한신자 총수 천2백58명” 역설
동토의 왕국, 폐쇄된 주체의 나라, 어느 국경보다 두터운 불신의 벽이 가로 놓인 북녘땅을 내가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언제 생각조차 했겠는가.

더욱이 평양땅의 성당에서 주일예절을 거행하리라고 어찌 상상조차 했겠는가.

그러나 나는 꿈이 나닌 현실로 8박9일간의 평양여행과 금강산관광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평양으로 떠나던 나의 손에 묵주를 꼭 쥐어주면서 “가방에 기도서와 성가집을 넣어 놓았으니 주일미사에 빠지지 말라”고 부탁하는 아내의 당부를 기억하면서 판문점을 넘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이때 나는 “이제 이 다리는 돌아올 수 있는 다리가 되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주님께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느끼면서 다시 한번 이 방문이 성공적으로 마쳐지고 이 다리가 ‘자유왕래의 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개성에서 기차에 올라탄 나는 창밖에 전개되는 북녘땅의 모습들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살펴보기 바빴다. 칸막이가 된 독실 안에는 음료수와 과일이 놓여 있었다. 음료수를 막 마시려는데 한 청년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민주전선 기자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청년은 “판문점 국회회담에서 여러 번 본적이 있다”면서 나의 이력을 줄줄 외는 것이다. “4.19세대인 박선생은 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신 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제하고 미군철수, 임수경양사건, 콘크리트장벽, 고려연방제, 보안법철폐 등 수없이 듣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논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메아리 없는 주장들이 오고갔다. 더 이상 같은 토론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나는 “북에는 천주교신자가 얼마나 있느냐”고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요,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당이야기를 계속하려하자 그는 “편히 쉬십시오”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대로 대화를 계속하다가는 그동안의 종교탄압실상이 폭로 될 것 같았던 모양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다음날 아침에 찾아가기로 합의 한 장충성당의 모습을 여러 형태로 상상해보았다.

개성에서 평양가지 1백76km의 거리. 우리열차속도라면 1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는 곳. 그러나 3시간35분만에 평양역에 도착했다.

벌거벗은 산하를 바라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을 안고 평양역에 내리니 남북국회회담 수석대표인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이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와는 14번째 만나는 친숙한 사이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준비된 벤츠차를 타고 숙소인 주암산초대소로 달렸다. 넓은 도로에 비해 자동차는 거의 없었고 길 양쪽의 고층건물의 계속되고 곳곳에 붉은 글씨의 구호가 유난히도 크게 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 만세’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주체사상 만세’ ‘우리는 행복합니다’ 온 건물마다 구호 천지였다. 길가는 사람도 도시에 비해 너무 적었다. 텅빈 도로에 교통경찰은 군데군데 보였다. 간혹 무궤도 보스가 지나가고 남세(채소)상점, 식료품전, 리발관들의 간판은 보이는데 안에는 손님하나 없이 텅 비어 있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이상한 모습들뿐이다. 대동강을 끼고 라일락꽃이 핀 모란봉기슭을 따라 숙소에 도착한 나는 싱그러운 봄의 향취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숙소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멀리 보이는 평양시가지를 쳐다보니 주체탑이 높이 솟아 있고, 아파트촌이 한창 건설 중이었다. 옆에 불어 다니는 안내원에게 “내일 우리가 갈 장충성당이 어디 있소”라고 물어보았다. “여기서 10분이면 갑니다”라고 했다. 그 외의 천주교에 대한 질문에 안내원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설레는 마음과 흥분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평양 이틀째를 맞이하게 되었고 동료 김현욱 의원과 함께 성당을 찾았다. 성당문 앞에 장재철 조선천주교협회위원장과 고수산나 대외사업담당자라는 자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호를 긋고 성당 안에 들어서니 백여 명의 신자가 예절을 거행하고 있었다. 5분쯤 늦게 입장한 것 같았다. 자매들의 미사포를 보는 순간 가벼운 흥분과 평양시가지의 쓸쓸한 모습과는 달리 포근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백여 평 남짓한 내부 2층에 피아노와 성가대석이 있는, 건물은 비록 조잡하지만 성전으로서의 구조는 갖추고 있었다.

신부님이 계시지 않으니 자연 신자들중에서 예절을 인도할 수 밖에 없었다.

신자협회 부회장인 차성근 율리오(50세)씨가 주일예절을 주례하고 있었는데 그는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아직도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고 남쪽으로 부터 보내온 교리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돌아가신 박경수 바오로씨의 독실한 신앙심을 이어 받았다고 하며 같은 부회장을 맡고 있는 동회만 다니엘 형제는 신자를 찾기 위해 하루 70~80리를 걸어 다니곤 한다고 했다. 눈물겨운 전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대외사업담당 고수산나 자매의 뜨거운 믿음도 돋보였다. 이 성당도 88년 조선천주교협회가 발족되고 장위원장의 모친이 2만원을 헌금한 것과 신자헌금 20만원, 국가로부터 10만원을 차입하여 8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현재 교적에 등록된 신자는 3백명, 전국적으로 파악된 신자는 1천2백58명이라고 한다. 장위원장은 앞으로 개성, 남포, 평성 등(탄압 속에서도 믿음을 잊지 않고 숨어서 기도생활을 한 신자들이 많이 계신 곳) 에 성전을 건축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성전건립비는 저축은 꿈도 꿀 수 없고 봉헌금으로는 현상유지(국가에 바치는 관리비 등)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남북이 교류되고 협조의 길이 트이면 남쪽성당의 신자들로부터 성전건립비를 모금하여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다음 약속장소로 옮기기 전에 우리일행과 사목회 간부들은 기도를 하고 손에 손을 잡고 성가를 합창했다. 많은 신자들이 나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김수환 추기경님을 뵙고 싶다 단한번이라도 모시고 미사를 드리고 싶다”고 흐느끼는 비록 숫자는 적지만 오랜 믿음의 형제자매들, 위대한 천주님의 뜻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고독하고 외로운 북녘땅의 생활, 통제와 규제 속에서 믿음 이외의 위로와 평안이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느껴졌다. 비록 배가 고파도 그들에게 믿음이 있으면 행복하리라. 떠나기 전에 우리는 다시 장충성당을 찾았다. 우리를 반겨준 형제자매들과 다시 손에 손을 잡고 부르는 성가는 더욱 거룩했다. 건립헌금에 보태달라는 우리의 작은 봉투를 그들은 다른 북녘사람들과는 달리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주었다.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그들을 뒤에 두고 우리는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면서 보이고 또 뒤돌아보면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과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북녘의 형제자매를 굽어 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