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정부의 인구정책 이후 1973년 유신체제하에서 국민의 여론수렴 없이 비상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던 ‘모자보건법’. 법 제정이후 국내 낙태건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오늘날 연간 낙태건수 2백만이라는 ‘낙태왕국’의 오명을 듣게 됐다. 생명경시라는 사회악의 근본원인을 제공해준 모자보건법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 독소조항들을 모자보건법 제14조(정당화 사유)와 28조(처벌에 관한 규정)를 중심으로 고발한다.
‘정당화 사유’란 보통 낙태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말한다. 그 근거는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인간존엄에는 태아의 생명뿐 아니라 임부의 생명·신체에 대한 보호도 포함된다는데 있다. 그러나 태아와 모체와의 관계상 두 인격권이 충돌할 상황이 생기게 되며, 정당화 사유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지침으로 마련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기에는 의학적 사유(모체의 생명이 위협받는 경우), 우생학적 사유(저능아 기형아 출산이 확실한 경우), 윤리적 사유(강간 등에 의한 경우), 사회적 사유(양육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해당된다.
모자모건법 제14조 1항은 인공임신 중절수술의 허용에 관해 “의사는 다음 각 호 1에 해당되는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자)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 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고 밝히고, 해당되는 사례를 명시해 놓았다.
첫째,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다. 이 법의 시행령 제15조는 유전성 정신분열증, 조울증, 현저한 범죄경향이 있는 유전성 정신장애, 기타 유전성 질환으로 그 사례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과연 유전성 여부가 과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또 현저한 범죄경향이라든가 기타 규정은 낙태허용 범위를 거의 무한대로 넓히는 것일 뿐이다. 혹 유전성이 확인된다 해도 낙태의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생존할 가치가 있는 생명과 그렇지 못한 생명에 대한 판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다. 역시 시행령은 풍진 수두 간염 홍역 뇌염 결핵 등을 해당 사례로 규정해 놓았다. 이것은 한마디로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셋째,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경우다. 이른바 앞서 말한 윤리적 정당화 사유를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인정할 수 없다. 부녀의 인격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권이 다른 낮은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넷째,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한 경우다. 생명은 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는 있어도 법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태아의 생명권도 법률상 혼인 가능한 사이인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인정돼야만 한다.
다섯째, 임신의 지속이 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다. 여기서는 ‘모체의 건강’이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임신의 지속은 원래 부녀의 신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출산을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 과정에 속한다. ‘건강’이라는 개념은 따라서 확대해석의 위험을 안고 있고, 특히 ‘해할 우려’는 그것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다. 모체의 건강은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제한되어야만 한다.
이상에서 보듯 모자보건법이 규정하고 있는 5가지 정당화 사유는 그 자체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결과는 의사가 얼마든지 합법적 낙태를 위장할 수 있는 현실로 귀착된다.
낙태를 목적으로 제 발로 찾아온 부녀를 의사는 영리상 물리칠 까닭이 없을 것이며, 정당화 사유를 들고 나온다 해도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어디든지 해당시킬 수 있어 문제될 것은 없다. 혹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명백한 불법이라도 자기들만 아는 사실에 제3자가 개입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와 의사의 담합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의사와 시술의사를 제도적으로 분리하는 길 뿐이다. 그래야만 의사의 경제적 관심을 차단하여 정당화 사유를 객관적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모자보건법이 비난받아야 할 부분은 위반 의사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이 법 제28조는 “이 법의 규정에 의한 인공임신 중절수술을 받은 자와 수술을 행한 자는 형법 제269조 제270조의 규정(낙태죄)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는다”고 하여 형법적용 배제를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처벌규정이 없는 금지 내용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행한 고도의 속임수라는 것이 법률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이것은 ‘낙태를 전면 허용한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더욱 비난받을 일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모자보건법에 의거한다면, 태아의 생명권은 완전히 보호의 사각(四角) 지대에 놓여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모자보건법은 따라서 ‘낙태자유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낙태자유를 통한 인구증가의 억제, 이것이 이 법의 진정한 의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