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교회사연구소 연구발표회, 최기복 신부 강의 - 조선조 제사금령과 다산의 조상 제사관

김혜원기자
입력일 2018-05-24 16:25:22 수정일 2018-05-24 16:25:22 발행일 1985-11-24 제 148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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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 신앙과 유교사상 접목시도
제사 금지령은 한국 선교에 큰 타격
유교식 제사 고수… 한때 교회 떠나
유배서 풀려나 종교서적 저술키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ㆍ최석우 신부) 는 지난 11월 16일 오후 2시 편찬실에서 제 63회 월례연구발표회를개최, 수원가톨릭대 교수인 최기복 신부 강의로 「조선조 천주교회의 제사금령과 다산의 조상제사관」을 다루었다. 이날 실시된 최신부의 강의를 요약, 게재한다.

한국천주교는 18세기말엽의 시대적인 요청과 성호좌파(星湖左派) 실학자들의 지성적인 구도정신과 현실개혁의지에 의해 수용됐다.

이들은 유교와 천주교와의 조화를 통해 기존질서와 사회현실을 점진적으로 혁신하려는 보유론 (補儒論) 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특히 지식층을 입교시켜 단기간에 한국교회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북경 구베아 주교는 유교의 바탕이되는 조상제사와 공자숭배에 대한 금지명령을 내려 조상숭배를 국교처럼 신봉하던 조선사회에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던져주었다.

당시 조선사회가 천주교라는 이질사상의 도전에 대해 강한 응전으로 대응, 1세기에 걸친 박해를 일으키는 계기가된 제사금지 명령은 한국천주교회 선교에 큰타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신해박해이전에 서학서를 연구하다가 입교한 양반지식층이 이탈했으며 천주교 신앙의 순수성과 절대성이 강화된 반면 토착화에는 장애를 초래했고 천주교와 유교의 관계가 이성적 논리에 입각한 대화나 논쟁보다는 생사를 건투쟁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박해의 불씨가 된 제사 문제를 놓고보면 유교의 조상제사에 대한 시각과 이해에 있어 당시 천주교회와 유교인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 유교인들은 조상제사의 근본의의를 자손들이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보본ㆍ보은(報本ㆍ報恩)」과 「죽은 후 살아계실때처럼 섬긴다(事死如事生)」는 의미의 계효(繼孝)에 둔 반면 천주교회는 죽은 영혼이 음식을 맛보는 흠향(歆饗) 에 제사의 뜻이 있다고 이해, 사후영혼은 흠향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유교적인 봉건체제에 시달리던 계층과 벼슬길이 막히거나 포기한 사대부들은 사후 천당에 모든 기대를 걸고 개인적인 영혼구원에 힘쓰거나 이상향을 꿈꾸며 혁신적인 방법으로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속에 제사를 폐했고 전통사상과 문화에 대한 자긍과 지성적인 주체의식을 갖고서 전통사상과의 조화를 통해 점진적인 사회개선과 민족구원을 위한 지식인과 학자들은 제사금령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무부(無父)의 멸륜패상(滅倫敗常)으로 받아들여 교회를 떠나게됐다.

전자는 신앙의 순수성ㆍ절대성에 치중, 제사를 폐한데 반해 페제를 거부한 후자는 지성적인 양심에 의거, 교회의 명령이라도 무조건 맹종하지 않고 토착화에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의 하나로 유교식 제사를 고수했던 다산 정약용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산은 누구보다도 공자와 맹자의 정신과 사상에 충실했던 군자유(君子儒)로 제사금령을 거부하면서 한때 교회를 떠났지만 인격적이고 주재적(主宰的)인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양심과 성의(誠意)에 입각해서 생활한 천주교인이었음을 알수있다.

입교후 천주교 신앙과 유교사상의 조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현실개혁과 민중구원을 이루려고했던 정약용은 제사금령을 전통사상과 인류도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고 판단, 교회를 떠났으나 천주교에 관련됐다는 비난을 계속받았고 마침내 이로인해 18년동안의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생활 중 다산은 유교의 상제례에 대해 깊이 연구, 인륜의 근본이되는 부모에 대한 계효를 강조하고 당시 제사와 향연의 사치 풍조를 바로잡는 동시에 상제례를 통해 이효를 심화,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한다는 뜻에서 「상의절요」등 4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다시 천주교에 귀의, 여러 종교서적을 저술하다가 유방제신부로부터 성사를받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는데 다산은 유교식 상제례만은 끝내 고수, 자손들이 장사일체를 그의 유명(遺命)대로 준행했다.

다산이 이처럼 천주교를 신봉하면서도 폐제(廢祭) 명령만은 끝까지 거부한 것은 지성적인 비판의식과 주체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싶다.

다산의 효사상을 보면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실천방법에서 천부의 인정 (人情) 에 따라 일상생활속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부모의 뜻을 받들어 행하면 된다고 보았고 제사는 보은ㆍ보본의 정신으로 부모의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자손들의 정성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다산은 서학의 과학정신과 천주교사상 등을 바탕으로 제례를 혁신하되 유교식 조상 제사가 없애야 할 허례나 미신적인 행위로 생각하지 않고 계속 살려나가야할 「보본계효 (報本繼孝)」의 상징적인 의식으로 여겼다.

당시 유교와 천주교가 각기 한편에 치우쳐 유교가 철학적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종교적인 면이 약화됐고 반대로 천주교는 신에 대한 믿음과 공경에 치중, 현세와 인륜을 경시하는 이원론의 경향이 농후했는데 다산은 인륜과 신앙을 연결, 두 차원을 군자의 인격 즉 성숙한 인격안에서 조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윤리와 신앙, 내세와 현세를 분리하지 않고 성숙한 인격안에서 조화 일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다산의 신앙세계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선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아직도 민족과 교회안에 영향과 상처가 깊이 남아있는 조상제사금령이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전통문화와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토착화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문제로 생각해야 할 때라고 본다.

나아가 제사폐지를 거부하고 교회를 떠났던 한국천주교회 창립주역에 대해 배교자로 평가하기에 앞서 폐제명령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조치였는가를 객관적이고도 냉엄하게 비판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겠다. 끝으로 조상제사문제는 선교 제 3세기를 맞은 한국천주교회의 복음화에서 거울로 삼아야할 역사적인 교훈이며 다산의 조상제사관과 신앙관은 전통사상과의 대화 및 토착화에 빛을 던져주리라 생각한다.

김혜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