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내가 체험한 6ㆍ25]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8-02-12 17:41:17 수정일 2018-02-12 17:41:17 발행일 1994-06-19 제 191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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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성녀 마리아 고레티 그리고 6ㆍ25 
“전쟁 고아 돌보며 성소 결심”
고레티 전기 읽고 성소 다져
미군부대서 살림 부식 구걸
“당시 원생들 찾아올 때 기쁨 느껴”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는 6ㆍ25와 관련한 독특한 신앙 체험을 갖고 있다.

6ㆍ25를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말로써는 풀 수 없는 인고의 경험들이 있겠지만 정 주교는 50년 6ㆍ25 발발 당일 로마에서 시성된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와 잊을 수 없는 교감을 체험했다.

미군부대에서 우연히 읽은 성녀 마리아 고레티 전기가 사제 성소를 확고하게 다져주었고 6ㆍ25가 발발한 지 만 20년이 되던 해인 70년 6월 25일에 주교로 임명된 것도 성녀 마리아 고레티의 기도 덕분이라고 정 주교는 믿고 있다.

6ㆍ25 당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학년생이던 정 주교는 9ㆍ28 서울 수복까지 서울 혜화동 자택 지하실에서 3개월 동안 숨어 지낸 것 외에는「영어」하나로 별 어려움 없이 전쟁을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이 수복된 이후「국민 방위군」에 지원 입대한 정 주교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문경새재로 해서 마산, 함안까지 피난민을 인솔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경남 함안에서 한 달 동안 피난민들과 함께 방위군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국민 방위군 사관학교」에 입대한 정 주교는 51년 4월 제3기 국민 방위군 소위로 임관했다.

정 주교는 그러나 그해 5월 수용소 난민들의 부식을 갈취한「방위군 부정사건」이 터져 관련자들이 군법회의에서 사형 당하고「국민 방위군 사령부」가 해산됨에 따라 전투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군생활을 마치게 됐다.

방위군 해산과 함께 미군 통역관이 된 정 주교는 강원도 화천 차량 정비부대에 배속돼 한국인 노무자들의 관리 책임자로 52년 8월까지 일했다.

정 주교가 당시 최고의 직업이었던 미군 통역관 직을 그만둔 동기도 참으로 우연찮다.

52년 초 피난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휴가차 부산에 내려온 정 주교는『한 신부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6ㆍ25 당시 황해도 연백본당 주임으로 있던 김영식(베드로) 신부를 찾아가 만났다.

자신을 찾아온 정 주교에게 김영식 신부는『미군 병참기지가 있는 인천 부평에 고아원을 운영할 계획』을 밝히고『영어를 할 줄 아니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정 주교는『8ㆍ15 전까지 자신의 모든 일을 청산하고 신부님을 돕겠다』고 선뜻 약속하고 돌아간 후 약속대로 8월 15일에 김 신부와 만나 현재 부평에「연백 성모원」이란 간판을 걸고 15명의 전쟁 고아를 모아 고아원을 설립했다.

『해방 직후 무신론적 유물사관에 빠져 있던 내가 47년 윤현중 신부님의 명동성당 사순절 특강「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듣고 회심한 이후, 사제가 되겠다는 마음을 남 몰래 키워오다 전쟁의 잔악상을 체험하면서 또 한 번 인생의 존재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돼 쉽사리 모든 것을 버리고 김 신부님의 일을 도울 수 있었지』

정 주교는 고아원에 들어온 이후 매일 같이 김 신부와 함께 미군부대를 찾아가 김영식 신부는 미군에게 라틴어로 성사를 집전하고 정 주교는 영어로 미군에게 고아원에 필요한 부식과 살림을 구걸했다.

이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자 고아원생들은 하나 둘씩 붙어나 살림이 늘어났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고아원생이 1백20명이나 됐다고 한다.

정 주교가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

우연히 미군 군종신부 사제관에 들런 정 주교가 문고판「마리아 고레티」성인전을 빌려 읽게 되면서 각별한 인연이 시작된다.

고레티 성인전을 읽으면서 번역을 곧바로 시작한 정 주교는 이때부터 사제 성소를 확고히 결심했다고 한다.

정 주교가 번역한「마리아 고레티」전기는 53년 9월「경향잡지」가 복간되면서 연재됐고, 그 후 단행본으로 나왔다.

6ㆍ25가 만들어준「연백 성모원」과의 인연은 정 주교가 54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도 계속됐다.

정 주교는 방학 때마다 성모원을 찾아가 학기 중 자신이 없는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양식을 미군부대에 찾아가 구해야 했다. 정 주교는 함께「연백 성모원」을 도와 일했던 김영식 신부의 조카 김영일 신부(현 서울 응암동본당 주임)와는 형제처럼 지내며 사제서품 때까지 고아원일을 도왔다.

정 주교는 또한 미군이 한국인을 위해 병원 설립을 계획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설계도를 직접 그려 제출, 인가를 받아「연백 성모원」옆에 병원을 짓게 됐는데 오늘날의 부평 성모자애병원의 전신이다.

『지금도 자신의 사제 성소를 확고히 다져준 연백 성모원 시절을 잊을 수 없다』는 정 주교는『이젠 함께 늙어가는 처지가 된 당시 원생들이 한 번씩 찾아올 때면 더없는 삶의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 주교는『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줄 전쟁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현재 위기 국면을 회개와 화해로써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