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 전 4월 16일이 바로 어제같기만 하구나. 사순시기 성주간에 떠난 수학여행에서 하늘나라로 가버린 아들을 엄마는 오늘도 기다린다.
네가 여느 날처럼 학교를 간 듯해 너를 기다리다 심장이 뚫리는 고통을 겪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너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 너의 얼굴이 손에 잡힐 것 같아. 학교를 마치고 네가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아무리 힘들고 우울한 일이 있었어도 한 순간에 마음이 환해지곤 했단다.
밤이 돼도 엄마와 아빠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우리 건우를 어딜 가면 찾을 수 있을까? 하루만 더 살고 하루만 더 견디자는 심정으로 버텨온 시간이 제자리인 줄 알았는데 1년이라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알 수가 없어. 우리 건우 못 본 지가 벌써 그리 됐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어쩌다 내 아이를 빼앗겼을까? 밤낮으로 지켜 키운 내 아들을 세상 부조리에, 물질적 이기주의에, 부패한 권력에 잃은 것 같아 어떨 때는 내 마음에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두 눈 뜨고 내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던 절망스럽던 고통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심장이 뚝뚝 끊기듯 뛰는 아픔, 살점이 떨어지는 듯한 쓰린 아픔이 잠도 멀어지게 한다. 매일 고통의 시간들을 겪는데도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 아니 변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겠지.
여전히 남의 아픔이고 남의 일인 것인가 보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장됐는데도 사람들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질타만 난무할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이런 모습을 모두 보고 계시겠지.
어떻게 해야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가 될까? 내 아들의 죽음조차도 돈으로 치부되는 세상이 정말 싫구나. 건우야, 너는 공부는 남달리 뛰어나지 않았어도 배려와 사랑을 아는 아이였어. 그래서 엄마 마음에 꼭 드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너의 부족한 모습이 더 사랑스러웠던 것 같아. 어찌 너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니? 세속적인 세상의 시각이 더 슬프구나. 너 없는 하루가 이렇듯 의미 없고 행복하지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돈 없이 너와 함께함이 행복했다는 것을, 살 가치가 충분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지금은 도무지 느낄 수 없어 정말 이 엄마는 힘들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매달리며 매일미사 안에서 너를 만난다는 일념으로 미사를 내 생명줄인 양 붙잡고 살았구나.
나를 보고 잊으라고 덮으라고 그만하라고 이제 그만 됐다고 지겹다며 화를 내고 막말을 해대는 사람들도 있더구나.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았을까 고민도 해 본다. 욕심내고 살아본 적도 없었고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었다. 나는 그저 우리 아들만 있으면 부족한 것이 없다 여기며 하느님 안에서 살다 가면 족했던 엄마였을 뿐인데…. 하느님은 아시려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사람에게 치유 받고 위로 받지만 너를 빼앗긴 상처의 치유자는 오직 하느님이시겠지.
건우야! 수학여행 가기 두어 달 전 너랑 나눴던 대화가 잊히지 않는구나. “엄마, 아빠 죽거든 제사 말고 연미사를 넣어다오.” 이 말이 자꾸 떠올라 슬퍼진다. 자식이 부모의 연미사를 넣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연미사를 넣어야 하는 엄마의 이 아픔을 어찌 평생 짊어지고 갈까.
엄마, 아빠가 지상여행 마치는 날 우리 건우 세례자 요한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게 잘 살다 가야할 텐데. 그날이 오면 꼭 마중 나와주렴. 엄마, 아빠 너에게 가기까지 하루하루 힘들어도 잘 살다 갈게. 그래야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건우도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부탁드려줘. 엄마의 시간 그리 길지 않도록 해달라고. 건우야! 엄마는 너를 만나 참 행복했어. 사랑해. 영원한 나의 아들 김건우 세례자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