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3대 교구장 맞은 제주교구의 어제와 오늘

입력일 2011-06-29 04:45:00 수정일 2011-06-29 04:45:00 발행일 1984-02-05 제 1391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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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본당에 신자수는 2만 여명 …… 사제교는 18명
제주교구 새교구장 맞아 도약의 발판 다져
유일한 섬교구에 초미니 교구
71년지목구로 출발한 「막내」…… 농어촌개발에 주력
제주도 전역을 사목지역으로 관할하고 있는 제주교구에 지난 1월 26일 제3대 교구장인 金昌烈 주교가 착좌함으로써 제주교구는 1년반 동안의 교구장 공석기간을 끝내고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제주교구의 발전과정과 현황 등을 살펴보고 진단해본다.

제주교구는 1971년 6월 28일 광주대교구 관할의 제주대리구에서 지목구로 승격된 남한의 14개 교구중 「막내동이 교구」로서 교구역사는 13년에 불과하다. 제주교구는 설정 당시 지목구로 출범했는데 지목구란 교구와 똑같은 성격을 가진 독립적 사목단위이나 다만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성 직할로 그 지방을 사목한다는 내포하고 있다.

제주교구가 이렇게 출범 당시 지목구 형태로 시작된 것은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가 주교구 체제로 변신, 명실공히 독립교구 형태를 갖춘 이후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주교구이후 약10년만에 새삼스렵게 주교구 이전의 체제인 지목구로 제주교가 시작된 것은 그만큼 기존 여타 교구에 비해 한마디로 「교세(敎勢)의 빈곤」때문일 것이다. 62년 주교구이후 설립된 수원(65년 3월 22일) 마산(66년 2월 15일) 안동(69년 5월 29일) 교구 등 4개 교구가 모두 주교구로 출범했으나 제주교구만 지목구로 출범한 것은 이를 확인해주고 있다.

따라서 제주교구 설정 당시 한편에서는 교구수를 줄이고 있는 세계적인 추세에 비추어 교구분할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의견도 있었으나, 제주도는 행정상 도(道)로 승격된지가 오래이며 지역으로는 전라남도와 가까이 있지만 교통 및 생활권은 부산과 밀접해있고 풍속의 차이점도 많아 독립교구 설정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주교구가 설정되면서 당시 광주대교구장 이었던 꼴룸바노회 소속인 故 현하롤드 대주교가 초대교구장에 자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대주교는 제주교구장 임명 소식에 『소원대로 제주도로 가게 돼 무엇보다 기쁘다』고 소감을 말해 현대주교가 제주교구 신설을 소망했으며 제주교구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현 대주교는 대주교의 신분으로 지목구장에 취임함으로써 『대주교=대교구장』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난 진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설정배경이 특수한 제주교구는 설정 당시 도내인구 28만여명에 1만명 조금 넘는 신자수와 8개 본당에 성직자는 한국인 6명 외국인 14명, 도합 20명의 「초미니 교구」였다. 그러나 제주교구의 설정은 제주도가레저의 일반화 추세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때라 제주복음화에 일대 전기를 모았다.

지목구체제로 시작된 제주교구는 76년 3월 1일 지목구장 현 대주교의 서거로 후임 교구장이 임명될 때까지 1년여 동안 1차 교구장 공석기간을 맞이했다.

77년 3월 21일 제주지목구는 공석주인 교구장에 박정일 주교가 임명되면서 지목구에서 주교구로 승격됨과 동시 한국인 교구장에게 사목권이 이양됐다.

주교구 승격 당시 제주교구 교세는 지목구 설정 때와 비교하면 본당 수는 1개가 늘어난 9개, 신자수는 약2천명이 증가한 1만3천여명, 한국인 신부는 2명이 늘어난 8명이었으나 외국인 신부는 14명에서 3명이 줄어 전체 성직자수는 오히려 1명이 감소됐다.

6년동안 제주교구가 눈에 드러나게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가톨릭신문사 특별취재반은 기획기사「복음화의 산실」 제주교구편에서 ▲대륙과 떨어진 고도로 인구이동이 없는데다 주민들의 샤머니즘적 기질이 강한 점 ▲오랜 세월동안 광주교구의 낙도 본당으로 그늘에 가려진 채 제대로 빛을 보지못한 점 ▲신생교구의 공동현상인 사제부족과 재정빈곤 ▲본당이 제주시내와 남ㆍ서부에 편재, 북부지역은 교세증가보다 보호가 시급한 실정에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주교구 승격과 함께 한국인 교구장을 맞아들인 제주교구는 이러한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착실히 내실을 다지면서 1개 본당, 81년에 2개 본당을 신설, 82년말 현재 12개 본당에 1만8천5백75명의 신자군을 형성하여 복음화율은 4%선에 육박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내신을 다져온 제주교구는 82년 6월 24일 교구장 박정일 주교가 공석중인 전주교구장으로 전보되면서 약1년반 동안 두번째로 교구장 공석기간을 맞았으나 이번에 새 교구장의 착좌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제주교구는 84년 1월 현자군을 형성했으나 신부수는 지목구 설정당시보다 2명이 감소된 18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부수의 감소는, 한국인 신부는 6명에서 12명으로 증가했으나 외국인 신부가 14명에서 6명으로 크게 줄어든 과도기 현상 때문이긴 하지만 사제부족 현상은 제주교구의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국내 유일의 섬(島) 교구인 제주교구의 외형적인 교세를 82년말 현재로 서울대교구와 단순 비교해 보면 본당수는 10분의 1, 신부수는 18분의 1, 대신학생수는 21분의 1, 신자수는20분의 1, 인구수는 20분의 1 등이다.

서울대교구의 1개 지구의 규모에도 못 미치는 초미니교구 제주교구는 비록 외형적인 규모에서는 여타 교구에 크게 뒤지지만 복음화율은 어려운 여건을 감안하면 결코 손색이 없는 교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주교구는 사제양성에 주력하면서 교구창설과 함께 추진해온 관광사목과 농어촌 개발사업을 효과적으로 전개해나간다면 소규모의 장점인 인화와 일치를 통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