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대구 안 주교 불어 친필 서류 2통 공개돼

입력일 2011-05-17 15:37:55 수정일 2011-05-17 15:37:55 발행일 1983-03-27 제 1348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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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초석 이룬 신앙 선조 신심 한눈에
대구교구「루르드」성모께 봉헌성ㆍ서원 완수 내용
교구사 편찬 자료 수집 중 발견
초대 대구교구장 안세화 주교(플로리아노)가 1911년 대구교구를「루르드」의 성모께 봉헌한 봉선 서약서와 7년 후 봉헌 서약이 완수되었음을 입증하는 서원 완수 증서 등 두통의 1안 주교 친필 서류가 공개돼 황무지 상태에서 오늘날의 대구대교구 초석을 이룩한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신심과 거룩한 넋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불어로 쓰여진 이 두통의 서류는 교구가 한국 교회 2백주년을 계기로 대구대교사 편찬을 위해 각종 자료를 수집 하던 중 발견한 것으로, 2백주년을 준비하는 교구민에게 크나큰 힘과 용기를 더 해주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먼저 1911년 7월 2일 작성한 봉헌 서약서는「루르드」의 성모를 대구교구의 수호자로 모시고 12월 8일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을 파공 대축일로, 2월 11일「루르드」의 성모발현축일은 파공 없는 기념 축일로 정하고 있다.

안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대구 교구의 재정 관리를 맡아 주실 분』으로 모시고『복음 선포를 위해 유익한 사업의 기초를 다지는데 재정적인 걱정 때문에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성모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을 굳게 바란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안 주교는『만일 성모께서 새로 발족하는 이 교구의 빈약한 기금의 소비 없이 주교관 대지에 주교 및 선교 사제들이 거처할 집과 신학교를 건축하게 해주시고 준 주교좌성당이 되는 「루르드」의 성모 성당을 증축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시고 사도직 사업에 사용할 수입이 있게 해 주시면 나는 주교관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루르드」의 성모굴을 본떠서 비슷한 굴을 마련하고 모든 신자들이 이곳에 순례하도록 전력을 다할 것을 허원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1918년 10월 13일 작성한 허원 완수 증거서는 『천주의 모친께서는 찬으로 우리의 재정 관리자 되시기를 원하셨다』고 밝히고 『그것은 우리가 드린 허원의 대상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선 익을 위하여도 우리의 청을 들어주셨다』고 언급했다.

안 주교는 『그래서 세계 각처에서 보내 준 애긍 금으로써 전쟁이 우리의 의식주 문제도 어렵게 만들어 놓은 허약한 교구 재정의 소비 없이 해결되도록 해주셨다』면서 첫째 1913년의 주교관 완공과 둘째 1914년 신학교 건축을 지적했다.

그리고 안 주교는 셋째 허원의 대상이었던 주교좌성당의 증축을 성모굴 설치 이후로 미룬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1916년 말 소세(SAUCET)신부가 중병으로 희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형제 신부를 회복케 해주시면 주교좌성당의 증축 이전에 성모굴을 먼저 설치하겠다고 약속을 드렸으며 성모께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1917년 7월 31일 성모굴을 위한 대지 공사에 착수했는데『1917년 12월 30일 연말이 되기 전에 성모께서는 우리에게 주교좌 성당 증축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마련해 주셔서 두 달 안으로 허원의 셋째 대상도 성취되기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성모굴은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가톨릭 청년 회관들을 두루 내려다보고 대구시도 내려다보이는 주요지에 설치했으며 성모굴의 설계와 모형은「루르드」의 것을 본 따고 가능한 대로「루르드」성모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면까지「루르드」의 성모굴과 흡사하게 했다. 또 외부는 벽돌로 내부의 굴은 시멘트로 건축양식은 교황 레오 13세께서「바티깐」정원안에 세운「루르드」의 성모 기념굴을 모방해 만들고 자연스러운 및 한국인 사제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안 주교는 또 1918년 10월 13일 성모굴 축성식 광경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그날 먼저 성모굴과 성모상을 축성하고 성모굴 체단에서 성가대 미사, 성체강복이 있었다. 저녁때에도 한국인ㆍ일본인 신자들, 신학생들, 사제들이 모여 아베마리아를 노해하였다. 이 행사에는 먼저 라띤어, 다음에 한국어, 일본어, 마지막에 불어로 노래를 불렀다』고 밝혔다.

안 주교는 『대미사 후에 성모굴 순례에 관한 사목서를 앞으로 순례할 모슨 신자들까지 포함해 공개 발표했다.』고 전하고『이 사목서는 각 본당에 배부되어 모든 임지와 공소에서도 읽도록 하였고 사제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읽을 수 있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이를 두 서류는 각각 3통씩 만들어 하나는 주교좌성당「루르드」의 성모상 밑에, 다른 하나는 프랑스「루르드」 성전에, 나머지 하나는 대구교구 문헌 문고에 보관했는데 1911년 7월 2일 주교좌성당 성보상 밑에 두었던 봉투는 1918년 5월 20일 제대칸 보수 작업 관계로 회수됐다.

그런데 1911년의 봉헌 서약서는 안 주교와 외국인 사제들과 전교사들 그리고 저명한 신자들이 서명했으며 1918년의 허원 완수 증거서에는 안 주교와 축성식에 참석한 외국인 및 한국인 사제들이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