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이식 관련된 판정은 잘못”
‘죽음’과 ‘죽음의 순간’에 관련된 가톨릭 교회의 최초 언급은 1957년 11월 24일 멘델연구소가 개최한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모인 의사들에게 교황 비오 12세가 행한 담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환자의 죽음과 죽음의 순간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확인하는 일은 의사들의 영역에 속하며… 그것은 교회의 권한 밖에 있는 문제”라고 언급함으로써 죽음의 순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의사들에게 유보시켰다.
이렇게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의학적 죽음이라든가 장기 기증자의 죽음에 대한 확인 등을 위한 기준들을 정의하는 일은 윤리신학자들의 임무는 아니다. 이러한 임무는 의학과 그 연구 기술 분야에 속한다.
죽음의 순간에 관한 정의
이 점에 관해서 1985년 10월 21일부터 3일간 열린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가 주최한 생명의 인위적인 연장과 죽음의 정확한 순간 결정을 다룬 세미나에서 내린 죽음의 순간에 관한 정의는 죽음의 순간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견해를 조금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이 세미나에서는 뇌사 곧 뇌 기능의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정지를 증명할 수 있는 다양한 의학적 방법과 장치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면서, “인간 신체의 정신적 및 육체적 기능을 조절하고 통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의 불가역적인 상실, 뇌의 전 기능의 불가역적인 정지가 죽음의 순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세미나에 참석했던 E. Sgreccia 주교(현재 교황청 생명학술원 원장)도 “수 시간 동안 대뇌피질의 활동뿐만 아니라 호흡이라든가 심폐기능, 신경 반사 작용 등과 같은 신체 기능과 연결된 뇌의 중심적 활동이 불가역적으로 정지될 때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다.
“사실 인간 개인에게는 비록 정신적 삶이 실제의 삶으로부터 방해받는다 하더라도 존재론적 행위만 있으면 살아있다고 본다. 그러한 행위는 모든 생명적 기능, 생장 기능, 감각적 정신적 기능까지도 활발하게 만들어주며, 지탱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적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생명적 기능들이 그 기능을 멈추게 될 때, 육체적 인간 생명은 끝났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영혼과 육신이 서로 분리된다고 볼 수 있다.”
곧 뇌의 생명력이 다함으로써 인간의 생명력이 다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세미나는 뇌사를 의학적 죽음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 세미나에 참석한 의사들에게 행한 담화를 통해 “의사는 생명의 주인도 아니고, 또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죽음은 인간 생애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이므로, 이를 피하는 방법으로만 치료를 이끌고 가서는 안 된다. 그 인간 조건에 따라 신중히 생각되고 처리되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뇌사를 죽음의 순간으로 인정하는 데에 이미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근 1995년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를 통해 출판된 ‘의료인 헌장(Charter for Health Care Workers)’에서는 공식적으로 ‘뇌사를 의학적 죽음으로 인정’하면서, 거기에 따르는 장기이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료인 헌장’은 뇌사와 관련된 장기기증 및 장기이식이 “생명에 대한 봉사”일 때 그 도덕적 가치가 드러나며 또한 그러한 의료 관행이 정당화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 대한의학협회에서는 이미 1983년에 뇌사에 의한 사망 기준을 선포하였으며, 2000년 2월 9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뇌사의 입법화에 따른 장기이식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법률 시행에 따른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보다도 뇌사 판정에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단지 장기이식과 관련지어서 뇌사를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뇌사 판정을 할 때 한치의 오판도 있어서는 안 되는 고도의 정확성이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뇌사 판정에 대한 연구가 장기 이식을 쉽게 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생명과 신체에 관한 성숙된 도덕적 의식이다. 뇌사가 장기이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현실이라면 이러한 의식의 성숙을 위한 노력이 더 요구된다 하겠다.
어쨌든 뇌사를 죽음으로 판정하는 것은 장기이식과 관련하여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생명으로 타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희생과 사랑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뇌사에 따른 장기이식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사랑의 장기기증일 때만 가능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뇌사가 인정되어 장기이식 수술로 타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면 오히려 더 큰 위험과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어 장기 매매로 이어질 위험성이 너무나 크다고 하겠다.
실질적으로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이 장기이식으로 생명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의료 행위들이 인간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고 그래서 인간 삶의 순리와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 삶의 참다운 가치와 본질을 가르치고, 생명 연장의 가치보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 더욱더 완전하고 큰 가치임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이창영 신부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위원·본지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