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농사짓고 밤에 교리를 배워 64년 3월 우리공소의 예비자 74명과 함께 영세했습니다.
그후 9년 동안은 공소에 잘 다니다가 73년부터 주일의 예절을 예사롭게 빼먹는 버릇이 들었읍니다.
그러던 중 오래 쉬다가 한번은 공소예절시간에 맞춰 공소를 찾았는데, 공소 정문입구가 철자 불쇠로 잡겨져 있는게 아닙니까?
이웃사람들에게 알아본 즉『두 세 사람이 나오는가 싶더니 오래전부터 신자의 발걸음이 뚝 끊어져 요새는 아예 잠궈 둔다』는 것이었읍니다.
생각해보면, 다른 농촌과 같이 우리 부락에서도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게 됐고, 처녀들은 죽자 살자 도시로 나가버리는 등 서글픈 현상을 익히 보아왔읍니다.
이와 함께 공소도 피폐해져 갈 수 밖에 없었던 게지요.
하여튼 저는 이후 13년간이나 냉담을 했읍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만은 때때로 꼭 바쳐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금년 6월 2일 택시를 타고가다 사고로 2개월간 입원하게 됐읍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내가 탄 차의 기사가 조금이나 더한 실수를 했어도『아차!』하는 순간에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병원에 누워 지난 13년 간을 돌이켜 보았을 때 진정으로 얻은 것도 생활에 보탬된 것도 없는 허무한 나날이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퇴원하던 날 저는 새로운 생활로써 저 자신을 변화되게 하기로 작심했읍니다. 그 후 어느 여름날 밤이었읍니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한손에 묵주를 쥐고 머리숙여 기도 바치는데『내 이름을 부르고 다시 기도하라』는 말씀이 들려, 깜짝 놀라『하느님, 13년간의 냉담자가 어떻게…또 하느님의 이름까지 부를 수 있으며, 이름을 부르면 더 큰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고 하신 말씀이 마음의 귀를 스쳤읍니다. 정신이 아찔했지만 저는 『하느님, 두통은 심해도 참을 수 있지만, 제발 가슴앓이만은 면케 해 주십시요. 이제는 당신 뜻대로 살겠나이다』란 기도를 끝내고 묵주기도를 하면서 잠들었읍니다.
다음날 아침,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토록 고통스럽던 가슴이 완전히 개운해져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날인 금년 8월 24일에 예절에 참례하려 공소를 찾았을 때 신자들이 손뼉을 쳐주며 반가이 맞아주었읍니다.
지금은 나와 나의 아내뿐 아니라 동생과 제수 등 온가족이 주일을 잘 지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