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일기(종료)

[최남순 수녀 교도소 일기] 42. 구름을 잡으려는 사람들 4

최남순 수녀ㆍ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입력일 2017-04-04 11:18:42 수정일 2017-04-04 11:18:42 발행일 1992-03-08 제 1795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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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자」이유로 억울하게 수감
자살 시도하다 교도관에 들켜
『제가 청송 제1감호소로 이송된 후 수녀님과의 편지왕래로 용기와 위로를 얻어 거듭나기까지는 사실 숱한 사연이 있었읍니다.

제가 전과3범이 되기전에 아버님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였던것입니다. 아버님은 그일로 뇌졸증을 일으켜 쓰러지시어 눕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빚을 다 갚긴 했지만 약값이 큰 문제였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할수없이 노동판에 나가 막노동을 해서 받는 돈으로 약 값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이때 친구가 찾아와 자기 약혼녀 집에 돈이 많으니 함께 한탕하지 않겠느냐고 유혹을 했습니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고민을 하다 한탕하기로 마음먹고 들어갔다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 초범때처럼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종교를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전기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79년 겨울 프란치스꼬 본명을 갖고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났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저를 진정한 인간으로 만들어 줌을 알긴 알면서도 그것이 싫었습니다.

3년휴 출소하여 집에 왔지만 어머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집에는 중풍환자인 아버님만이 홀로 계셨습니다. 이때 뒤늦게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출소한 아들의 손을 잡고 우시던 아버님은 두달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3남매는 뿔뿔히 헤여져 살게되었습니다. 저는 성남 모회사에 취직이 되어 다니던 중 현숙이란 아가씨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퇴근후에 자주 만났고 쉽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오빠가 뒷조사를 한끝에 전과 사실이 들어나자 적극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현숙이는 나 때문에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고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현숙이는 나를 보고 반가워 뛰어 나왔지만 오빠가 쫓아나와 실랑이를 부리는 동안 그녀의 엄마가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했고 나는 연행되었습니다.

파출소에서는 나를 내보내려고 하는데 그 오빠와 식구들이 나를 구속시켰습니다. 저는 전과자라는 이름 하나로 억울하게 또 교도소를 들어가 재판을 받게 되었고 아무리 해명을 하려고 해도 어쩔수 없어 감호 7년에 징역 1년6개월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때 감호가 새로 생긴 과도기여서 어처구니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상이 허무함을 느꼈고 믿음도 별로 굳지 못한때라 자살을 하려다가 담당 교도관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ⅹⅹⅹ

사회에서는 전과자를 특종 인물, 별개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통인것 같다. 가족이 있어도 오래동안 격리되어 살았기에 정을 느낄수 없어 서먹하다. 사랑에 굶주린 전과자들은 여러가지로 사회에 적응할 힘이나 능력이 부족하다. 평생 그런 어려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때 쉽게 자포자기하게된다. 그래서 삶의 가치관이 잘 정립되지 않은 사람은 전과자들의 고향인 교도소로 다시 찾아가게 된다.

그곳에는 자기를 이해해 주고 쉽게 받아드릴수 있는 친구가 있고 의식주를 걱정 안해도 된다는 편리함 때문에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교도소를 가고 또 가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는 똑같은 창조수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선과 악의 가능성과 잘못에 떨어질 수 있는 약점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들의 잘못을 폭넓은 이해와 사랑으로 받아드리고 형제적 사랑으로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풍토를 조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남순 수녀ㆍ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