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친교의 올바른 표현”
“부부 행위의 진리는 그것이 배우자들의 상호 자기 증여의 표현이라는 데 있다. 인간은 하나로서 완전하기 때문에 이러한 증여는 전적인 것이다. 부부는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전 존재로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도록 부름 받는다. 자기 존재의 어떠한 부분도 이러한 증여의 행위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바로 이 때문에 피임은 본질적으로 위법인 것이다. 즉, 피임은 이러한 상호 증여에 실질적인 제한을 가져오며 부부 행위의 두 가지 의의, 곧 일치의 의미와 출산의 의미 사이의 ‘불가분의 연관성’을 깨뜨린다.
자연 주기법을 그 본연의 윤리적 차원에서 분리하여 단순한 기능적 측면에서만 고려하는 것이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연 주기법과 인공 피임 사이의 심오한 차이를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연 주기법이 마치 또 다른 형태의 피임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자연 주기법은 분명히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연 주기법은 남편과 아내의 상호 증여의 논리 안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되고, 사랑과 생명의 실제적인 상호 친교의 바른 표현으로서 진정하게 실천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자연 주기법과 피임이 다른 이유”, 1998. 3. 27)
일반적으로 모든 가톨릭 신자 부부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존중하면서 부부의 성생활을 자유롭게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교회의 많은 학자들은 30여 년 동안 각고의 노력과 연구를 해 왔다.
그 결과 단순하면서도 해가 되지 않는, 또한 불안과 위험에서 벗어나 상호 간의 양심을 충분히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 주기법’을 제시하였다. 특히 오늘날의 자연 주기법은 가임 기간과 불임 기간에 대한 개연적인 계산을 뛰어넘어 한층 더 완전하고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무엇보다도 생리 주기, 배란 주기 및 시기 등의 이론에 기초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이렇게 부부가 임신할 수 있는 날들을 알아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자연적 방법은 산아 제한을 바라는 많은 부부들에게 임신할 수 있는 기간까지도 알려 준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 주기법의 적절한 교육을 통하여 부부들은 가임 주기를 쉽게 알 수 있으며, 하느님의 법에 일치되고 자신들의 친교와 일치에도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출산을 계획하고 출산 간격을 조정할 수 있다. 자연 주기법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대로 “대화와 상호 존중, 책임의 나눔과 자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 주기법은 가정생활에 안정과 평화의 풍부한 결과를 가져오며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배우자끼리의 배려와 존경을 북돋아 주고 참된 사랑의 원수인 이기주의를 몰아내며 서로의 책임감을 깊게 한다.
여성에게 임신의 가능성은 여성의 주기 중에서 며칠에 한정되어 있으며, 이 자연 주기법으로 부부는 부부 생활 중에서 가임과 불임의 과정들을 잘 인식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부부 상호 간과 자녀들의 선을 위한 그들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부부 관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자연적 방법을 단순하게 사용 규칙을 알고 따르는 것만으로 충분한 하나의 획기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가치는 우선적으로 삶의 형태를 미리 준비하고 또 향상시키고 발전시켜 준다는 데 있으며, 나아가 상호 간의 관계 형성을 위한 특별한 방법으로서, 사랑과 자유, 그리고 공동의 책임감의 발전을 위한 교육이라는 데 있다.
“부부가 산아 제한의 방법을 사용해서 창조주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의 됨됨이와 성적 일치의 역동성에 박아 주신 이 두 가지 의미를 분리한다면, 그들은 하느님 계획에 대한 ‘조정자’ 역할을 하고, ‘완전한’ 자기 봉헌의 가치를 변조시킴으로써 인간의 성(性)과 더불어 자신들과 결혼 동반자를 ‘조작하며’ 실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상호 간의 완전한 자기 봉헌을 표현하는 본래의 언어가 산아 제한이라는 객관적으로 모순 된 언어, 즉 자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바치는 것을 거부하는 언어로써 덮어 씌워진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개방성을 적극적으로 거부함과 아울러 인간 전체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 부부애의 내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자연적 주기의 선택은 여성의 주기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대화, 상호 존중, 책임의 나눔과 자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주기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는 것은 부부 일치의 정신적 육체적 성격을 인정하는 것이고 충실의 요구대로 인격적 사랑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부는 부부 일치가 육체적 차원을 포함한 인간적 성의 내적 요체를 이루는 부드러움과 애정의 가치로써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이 참되고 완전한 인간의 차원에서 존중되고 촉진되며, 결코 ‘대상’으로서 ‘이용’되지도 않을 것이고, 인간은 자연과 인간의 가장 깊은 상호 행위의 지평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침해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인격적 일치를 파괴하지도 않는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정공동체, 32항)
이창영 신부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위원·본지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