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 시대의 성인들] (3)성 알폰소 마리아 푸스코 신부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3-01-31 수정일 2023-02-01 발행일 2023-02-05 제 332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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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1910, 축일 2월 7일
빈민과 고아 위해 한평생 헌신하며 말보다 삶으로 신앙 증거

가난한 이들에게 꾸준히 관심
신학생 때부터 수녀회 설립 꿈꿔
1878년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설

성 알폰소 마리아 푸스코 신부가 2016년 10월 16일 시성된 뒤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미국 관구에서 봉헌된 감사미사 모습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제공

성 알폰소 마리아 푸스코 신부(St. Alfonso Maria Fusco, 1839~1910)는 평생을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며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Sisters of St. John the Baptist, 이하 수녀회)를 창립해 가난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바쳐 일한 성인이다.

1910년 선종 후 106년이 지난 2016년, 푸스코 신부는 그의 영웅적인 덕행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된다고 보편교회로부터 인정받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 신앙의 진면모와 순종의 자세를 유산으로 남긴 푸스코 신부의 발자취와 영성을 알아본다.

오랜 기도로 얻은 아이

푸스코 신부는 1839년 3월 23일 이탈리아 앙그리에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 넷이 있었던 그는 부모의 오랜 기도와 간절한 바람 끝에 태어나 부모에게 큰 기쁨을 안겨 줬다.

아버지 아니엘로 푸스코와 어머니 요세피네 쉬아보네는 1834년 1월 31일 결혼했지만 4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미리 준비해 놓은 아기 침대가 텅 비어 있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1838년, 앙그리 근처 파가니에 있는 구속주회 설립자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의 묘지에 기도하러 갔을 때, 부부는 구속주회 노 수도자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페코렐리로부터 예언 같은 말을 듣는다.

“아들을 얻을 것이니 이름을 알폰소라고 지으시오. 아들은 사제가 돼서 복자 알폰소(당시 복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이렇게 1년 뒤 푸스코 신부는 태어나게 된다.

푸스코 신부의 부모는 농부로 일하면서 어릴 적부터 엄격한 신앙 원칙 아래 하느님을 경외하며 자라나 푸스코 신부와 그의 형제들도 신앙 안에서 양육했다. 일찍이 온유하고 다정한 성품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동정을 지녔던 어린 푸스코 신부는 7살에 첫 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았다.

11세 때인 1850년, 푸스코 신부는 부모님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는 뜻을 스스로 밝힌 뒤 그해 11월 5일 노체라교구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3년의 긴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1863년 5월 29일 살레르노대교구장 안토니오 살로모네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됐다.

성 알폰소 마리아 푸스코 신부의 생전 모습을 담은 그림.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설립

푸스코 신부가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를 설립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열정적인 사제로서 성사 집전에 힘쓰면서, 특히 회개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알폰소 신부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일하며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다.

단순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설교를 통해 선교에 헌신하는 매일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오래된 꿈’을 잊지 않았다. 그 꿈은 수녀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푸스코 신부는 신학교 마지막 학년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 예수님이 나타나 그에게 “사제가 되면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수녀회와 소년소녀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라”고 부르시는 것이었다.

푸스코 신부의 오래된 꿈은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초대 총장이 되는 막달레나 카푸토를 만남으로써 빠르게 추진될 수 있었다. 카푸토 수녀는 수도생활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녔던 신자였다.

마침내 1878년 9월 26일 푸스코 신부는 카푸토 수녀 및 젊은 여성들 3명과 앙그리의 한 낡은 집에서 수녀회 설립미사를 봉헌했다. 9월 26일은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설립기념일로 지켜지고 있다. 수녀회 설립에 참여한 회원들은 가난한 생활을 실천해 자신을 성화하고 하느님과 일치하며, 고아들을 키우는 자비의 생활에 자신들을 헌신하기 원했다. 수녀회가 설립된 낡은 집은 곧 ‘섭리의 작은 집’(The Little House of Providence)이라고 부르게 됐다.

수녀회에는 청원자들이 찾아왔고 1878년 10월 5일에는 첫 고아가 들어왔다. 푸스코 신부는 “여러분은 거룩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여기 모였고,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며 수녀회 규칙서를 만들었고, 생활 안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매일 살아갈 것과 순명과 노동, 기도생활을 특별히 강조했다.

수녀회의 기틀이 잡혀갈 때, 고난도 따라왔다. 수녀회는 1880년 7월 관할 주교의 공식 인준을 받고 첫 착복식을 했지만, 이 무렵 푸스코 신부를 반대하는 이들이 푸스코 신부를 시기하고 중상모략했다. 푸스코 신부는 하느님의 뜻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 장상들에 대한 영웅적 순명, 하느님 섭리에의 무한한 신뢰로 모든 시련을 받아들였다.

푸스코 신부가 남긴 문헌 기록은 많지 않다. 그는 말보다는 삶으로 그의 신앙을 증거했고 수녀들에게 “우리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 성인이 되자”며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삶을 산다면 하늘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푸스코 신부의 영성은 수녀회 설립 목적에서 드러나듯이 가난한 이, 특별히 고아들에 대한 사랑에서 뚜렷이 발견된다. 푸스코 신부는 음식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을 때도 고아들에게 만큼은 먹을 것을 주었다. 그리고 소수 사람들에게만 교육받을 기회가 특권처럼 주어지던 시대 상황에서도 고아들이 교육 받을 수 있도록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푸스코 신부에게 교육받은 고아들은 정직하고 깊은 소명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푸스코 신부의 선종과 시복시성

수녀회를 설립하고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푸스코 신부는 1910년 2월 5일 밤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2월 6일 아침 그의 주변에 서서 울고 있는 수녀들을 떨리는 손으로 축복하며 “주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수녀들에게 몸을 돌리고 “하늘에서 잊지 않고 여러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평화롭게 주님의 품에 안겼다.

수녀회의 오랜 노력으로 푸스코 신부는 1976년 2월 12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됐고, 2001년 10월 7일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주례한 시복식을 통해 복자 반열에 올랐다. 2016년 10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푸스코 신부의 시성식을 주례하며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푸스코 신부의 시복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의학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잠비아 소년 제솜 기즈마가 치유된 사례가 기적으로 인정됐다. 1994년 5월 19일에 태어난 제솜 기즈마는 건강하게 생활하다 1998년 1월 18일 고열로 쓰러져 회복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푸스코 신부에게 전구를 청해 1998년 8월 19일 완치 판정을 받았다.

푸스코 신부의 시성에 요구되는 기적은 수녀회 소속 마리아 덜치스 미니엘로 수녀에게 일어났다. 미니엘로 수녀는 66세이던 2009년 7월 12일 아침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고, 회복이 돼도 장애가 남을 것이라는 의학적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푸스코 신부에게 전구를 청해 2009년 10월 25일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나며 이전의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다. 미니엘로 수녀는 기적적 치유가 인정된 뒤 봉헌한 미사에서 “푸스코 신부님의 전구로 치유돼 두 번째 생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