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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9·끝) 최양업, 길 위에 다시 서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12-20 수정일 2022-12-20 발행일 2022-12-25 제 332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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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 향한 목자의 사랑은 여전히 길 위에…
180여 년 전에 쓰인 빛바랜 편지 21통
가난하고 비참한 삶 속에서 신앙 지킨
신자들 처지 애통해하며 신앙 자유 갈구
시복 기원하며 발자취 따라 걷는 순례길
숨 다할때까지 하느님 전한 열정 느껴져

2022년 1월, 최양업이 오래전 쓴 편지를 꺼냈다. 180여 년 전 쓰인 빛바랜 편지에는 신자들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갈망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신부를 만나기도 어렵고, 마음 놓고 기도를 할 수 없었던 조선신자들의 신앙생활. 2022년을 사는 신자에게 선뜻 와닿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은 최양업의 글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몇 십리를 걷다 결국 길 위에서 생을 다한 신부의 삶. 21통의 편지를 통해 만난 최양업은 신자들을 위해 용기를 냈고, 신자들을 사랑했던 진정한 사제였다. 그렇게 읽어내려간 편지는 다시 겨울을 맞고서야 끝이 났다. 최양업이 보내온 편지는 이제 없지만, 편지에 꾹꾹 눌러 담아냈던 신자들을 향한 사랑은 길 위에 남아있다.

■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합니다. 그럴 때마다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동포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도앙골에서 1850년 10월 1일 보낸 서한)

안나, 바르바라, 조 바오로, 최해성 요한, 김 베드로, 아가타. 최양업의 편지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핍박받고, 목숨을 바친 수많은 신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남성보다 신앙생활이 어려웠던 여성 신자들이 보여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용기는 최양업에게 기쁨이자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그의 서한에는 외교인 집에 갇혀 19년간 성사를 받지 못했지만 신앙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안나, 동정을 지키다 열여덟 살에 세상을 떠난 바르바라, 숱한 위험에도 신앙을 증거했던 동정녀 아가타 등 사회적으로 소외됐던 여성 신자들의 안타까운 처지가 담겨있다.

피지배층이 대부분인 천주교 신자들의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목격하면서 최양업은 조선사회의 계급주의와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됐다. 이러한 시각은 서한을 통해 여러 차례 드러난다. 최양업은 천부적 인권이 무시되는 신분제도를 비판하며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평가해 사람을 등용한다면 양반 제도는 강제적인 노력이 없더라도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한다”며 공동선과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1842년 시작해 1860년에 끝난 최양업의 서한. 18년 동안 보낸 최양업의 편지들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신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점철된다. 하느님이 늘 곁에 있다는 믿음은 최양업을 다시 서게 했고, 신자들에게 향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상해에서 1847년 9월 30일 보낸 서한)

■ 최양업과 함께 걷고자 길 위에 선 신자들

“최양업 신부님이 사목하셨던 곳들을 다녀보니, 걸어서 다니셨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험난했습니다. 고행의 길을 걸으며 신자들을 향한 사랑과 그분의 신앙이 대단하심을 느꼈습니다.”

최양업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마련된 ‘희망의 순례’에 참가해 30개 성지를 순례한 김경수(스테파노·수원 곤지암본당)씨는 최양업이 ‘땀의 순교자’임을 느끼고 체험했다. 순교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여정이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기에 충분했음을 신자들은 순례를 통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가경자로 선포된 최양업은 시복을 위해 기적심사 통과를 앞두고 있다. 교황청 시성부가 지난해 5월 “기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 능력이 부족하다”라고 전해 심사가 계류됐으나 한국 주교단은 같은 해 10월 14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을 위한 기적 심사를 새롭게 추진하며’ 담화를 발표하고 “주교단은 이번 결과에 결코 실망하지 않고, 더욱 큰 정성과 열정으로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기도다. 최양업 신부가 걸었던 길을 함께 걸으며 곳곳에서 바친 기도가 모여 시복을 향한 열매를 여물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 기적 심사 청원인이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총무 박선용(요셉)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의 빈 공간을 당신 땀으로 채우신 모든 사목자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며 “최양업 신부님이 한국 교회에 좋은 모범으로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신부님의 전구로 은총을 청하면서 기도와 정성을 함께 바쳤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최양업 신부님과 관련된 기적의 사례가 있을 때는 관련 성지 신부님이나 주교회의 시복시성위원회로 꼭 연락해 달라”고 덧붙였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