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신앙 전통 ‘판공성사’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2-12-13 수정일 2022-12-13 발행일 2022-12-18 제 3323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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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감 떨쳐내고 하느님과 화해하세요
공을 세운다는 의미 ‘辦功’과
공로 판단한다는 의미 ‘判功’
부활·성탄 일 년에 두 차례
성찰의 기회 놓치지 말아야

주님 성탄 대축일을 2주 앞둔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상설고해소에는 판공성사를 보기 위해 신자들이 줄 서 있다. 미사를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신자들이 더해져, 줄은 한 바퀴 돌고 모자라 똬리를 틀었다.

며느리와 함께 고해소를 찾은 김귀순(마리아·75)씨는 인천교구 신자이고 매월 본당에서 고해를 하지만 성탄 때면 꼭 명동을 찾는다. 김씨는 “자주 고해하면서도 자꾸 똑같은 죄를 짓네”라며 “그래도 하느님 앞에 잘못했다고 빌면 마음이 편하지”라며 웃었다.

김영재(요셉·29)씨는 5월 취업에 성공한 직장인 초년생이다. 취준생으로 시달리는 동안 신앙생활도 멀어졌는데, 큰 맘 먹고 냉담을 풀었다. 그는 “고해는 항상 가슴 떨리는 일이지만 하고 나면 분명히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박정호(스테파노·54)씨는 잘하든 못하든 1년에 딱 두 번 부활과 성탄에 판공성사를 본다. 그는 “형식적이긴 하지만 1년에 두 번 판공만은 빠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곁에 선 부인이 “어이구 자랑이다”라며 핀잔이다.

청년부터 어르신까지 고해소 앞은 의기소침하게 들어가서 해맑게 나오는 신자들이 종일 줄을 이었다. “빨래 끝~!!” 외치듯, 크고 작은 잘못과 과오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고해소는 영혼을 닦는 빨래터다.

신자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성사가 고해다. 과오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죄를 고하는 상대방이 자비한 하느님임을 안다면 고해는 의무가 아니라, 힘과 원기가 샘솟는 치유다.

그 치유의 은총을 조금은 강제하는 것이 판공성사다. 박해시기 공소 신자들은 1년에 단 두 번 사제를 만났다. 봄, 가을 ‘판공’ 때다. 사제는 신자들이 열심했는지 시험을 보고, 통과하면 고해를 들은 후 전례에 참례토록 했다. 그래서 판공은 ‘힘써 노력하여 공을 세운다’(辦功)와 ‘공로를 헤아려 판단한다’(判功)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는다. 그 전통이 부활과 성탄을 앞두고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유일하게 한국교회에만 있는 제도가 됐다.

그런데 판공이 원래 취지와 달리 신자들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3년 이상 판공을 하지 않으면 냉담교우로 분류된다. 여러 이유로 판공을 하지 못해 죄책감이 들고 종종 냉담으로 이어진다. 이런 부담을 헤아려 주교회의는 2015년 가을 정기총회에서 “부활 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가 성탄 판공이나 일 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받았다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했다.

수 년 동안 전례와 성사생활에 접근이 제한된 아픈 체험을 했다. 미사 참례도 할 수 없던 시기에 고해성사는 더 어려웠다. 미사와 성사가 결핍된 신앙생활, 영혼이 메마르는 것을 느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성당 중심 신앙생활에서 일상 중심 신앙 실천으로의 전환을 이끈다고 여겨졌지만, 전례와 성사 생활을 가벼이 여기는 잘못이 우려됐다.

포스트 코로나의 교회 현실에서 그 징후가 보였다. 「한국천주교회 통계 2021」에 따르면, 주일미사 참례자 수가 정작 주일미사가 중단됐던 2020년에 비해서도 크게 감소했다. 판공성사도 마찬가지다. 부활 판공 참여자는 2020년 대비 18%, 성탄 판공 참여자는 78% 증가했지만, 팬데믹 전에 비하면 60%에도 못 미친다. 2022년 통계에서는 상황은 나아지겠지만 팬데믹 이전 대비 온전한 회복은 불투명하다.

판공성사는 순교자의 피땀으로 세워진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신앙 전통이다. 그것은 신앙인이 최선을 다해 이뤄야 할 ‘최대치’의 과업이 아니라, 열심한 신앙생활의 지표로 삼는 ‘최소한’의 자기 성찰이다. 주교회의가 현대 신앙인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 기한을 유연하게 규정했지만, 주님 부활과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에게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판공을 서두는 것이 합당한 자세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