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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7)최양업이 세상을 떠나고 152년 만에 전해진 두 통의 서한①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9-27 수정일 2022-09-27 발행일 2022-10-02 제 331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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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회 상황 전하며 박해 막기 위한 도움 요청 

2013년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서
소리웃과 안곡에서 쓴 친필서한 발견
베롤 주교에게 조선 조정 상황 알리고
조선이 종교의 자유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도움 필요하다는 입장 밝혀

1857년 소리웃에서 쓴 서한에는 다블뤼 주교 서품식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림은 1857년 3월 다블뤼 주교 서품식 장면을 그린 이종상 화백의 작품으로 대전교구 신리성지 순교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대건 신부 순교 후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던 최양업은 척박하고 모진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한 해에 7000리가 넘는 거리를 걸었던 최양업의 사목 열정은 그의 서한에 그대로 담겨있다. 가련한 신자들의 처지에 대한 상세한 묘사뿐 아니라 국가 정세와 조선교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까지. 조선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서양 선교사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최양업은 서한에 담아 세상에 알렸다.

고(故)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은 생전에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대해 “최 신부님의 편지 내용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충격적이며 교훈적”이라며 “누구나 편지를 통해 영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교회 역사에서 의미를 지닌 최양업 신부의 서한. 땀으로 신앙을 증거한 최양업 신부의 흔적을 찾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새로운 서한을 찾으면서 그 결실을 맺었다. 최양업이 세상을 떠난 지 152년 만에 한국 신자들에게 전해진 두 통의 편지를 소개한다.

■ 프랑스에서 전해진 최양업의 서한

2013년 최양업 신부가 쓴 서한 두 통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를 담당했던 고(故) 최승룡(테오필로) 신부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최양업의 친필서한 두 통을 확인한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의 중국 관련 문서철에서 찾아낸 첫 번째 서한은 1857년 10월 2일 소리웃에서, 두 번째 서한은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보낸 것이다. 수신인의 존재도 당시에 주목을 받았다. 기존 서한의 수신인이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 리브와 신부였던 반면 이 두 통의 서한은 베롤 주교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초대 만주교구장이었던 베롤 주교는 만주, 요동, 몽고 등의 선교에 힘쓰면서도 조선의 선교를 적극 지원했다. 조선 교우들이 보낸 박해상황과 소식들을 교황청에 보고했고 메스트르,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김대건, 최양업 신부 등의 입국을 도왔다. 최양업은 베롤 주교를 통해 교황청에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고자 서한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두 서한의 발견은 아직 찾지 못한 한국교회 관련 문서들이 곳곳에 남아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안겨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두 서한은 중국 관련 문서철에서 발견됐는데, 기존에 조선교회 관련 사료들이 분류돼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562권과 563권, 566권 외에도 중국관계 문서철을 재검토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베롤 주교에게 보낸 친필서한. 2013년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중국 관련 문서철에서 발견됐다.

■ 조선교회의 상황 베롤 주교에게 전하다

소리웃은 전라도 교우촌, 용인 손골, 불무골이나 오두재 인근 교우촌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최양업 신부의 1857~1858년 사목 경로 중 일부 지역으로 판단할 수 있다.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쓴 서한에는 1856년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입국한 사실, 1857년 다블뤼 신부의 주교 서품식, 그리고 성무를 집행할 때 외교인들과 충돌한 사건 등이 담겨 있다. 이듬해 10월 3일, 오두재에 쓴 편지에서 흉년과 가난으로 민심이 흉흉하다고 밝혔던 최양업은 소리웃에서의 편지에서도 “외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은 프랑스 배가 와서 조선 사회를 변화시켜 줄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말하며 조정을 불신하는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최양업은 1859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세 통의 서한을 쓴다. 10월 11일에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2일에는 리브와 신부에게, 13일에는 베롤 주교에게 각각 서한을 보낸다. 앞선 두 통의 서한이 교우촌과 신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조선 조정의 상황, 박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도움을 적고 있다.

최양업은 조선에서 외적인 박해가 중단된 이유를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분석함으로써 조선이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