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특집]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의 노숙인 급식 봉사 현장

이탈리아 로마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2-09-20 수정일 2022-09-20 발행일 2022-09-25 제 3311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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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임하라… 국경 넘은 사랑과 치유의 손길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자매회
로마 현지 노숙인 급식 활동
“모두가 주님 앞의 형제들”
10년째 봉사하며 사랑 실천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이 8월 25일 (로마 현지시각) 성 베드로 광장 주변 노숙인들을 찾아 다니며 주먹밥 형태로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

■ 노숙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지난 8월 2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김효정(야고보) 수녀와 이관우(마태오) 수사 등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은 주먹밥 형태로 만든 100인분 음식을 카트에 가득 싣고 광장으로 연결되는 지하도를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매일 저녁이 되면 어딘가에서 낮 시간을 보내던 노숙인들이 하나 둘 성 베드로 광장 주변으로 모여든다.

“차오”(Ciao, 안녕하세요), “부오나 세라!”(Buona sera, 좋은 저녁입니다) 수도자들이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노숙인들에게 인사를 건네면, 노숙인들 역시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맞이한다. 한국에서 보는 노숙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을 경계하거나 피하려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노숙인들은 수도자들이 건넨 주먹밥을 맛보며 “벨리시모!”(Bellissimo, 최고!), “그라치에”(Grazie, 고맙습니다)를 연발한다.

수도자들은 성 베드로 광장과 교황청 부속건물 주변에 종이 박스를 깔아 놓거나 작은 텐트를 치고 자리 잡은 노숙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나 식사를 전달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짧은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지만 가끔 수도자들을 붙잡고 자신의 사연을 오래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노숙인 생활을 하는 나에게 매주 찾아와 먹을 것을 나눠 주니 너무나 고맙다”, “언제 이 생활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르지만 사회에 돌아간다면 수도자들이 준 도움을 기억하고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살겠다”는 대화가 주를 이룬다.

세상 사람들은 ‘노숙인’이라고 부르지만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은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 여긴다. 꽃동네 영성의 핵심이다. 노숙인들과의 친밀감도 오랜 만남을 가지며 차차 서로 마음을 열어 형성된 것이다.

로마 꽃동네 책임자 박형지 수녀는 “노숙인들 중에는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분들도 있지만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도 많다”며 “신앙이 다르거나 신앙이 없어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육신의 양식이 아닌 영혼을 위로하는 양식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 끊길 수 없는 사랑의 손길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이 성 베드로 광장 노숙인들에게 온기를 담은 식사를 제공한 지 올해로 벌써 10년째가 된다.

교황이 2013년 3월 즉위한 후 그해 8월 교황청 초청으로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자매회 설립자 오웅진(요한 사도) 신부가 교황을 알현하고 느낀 것이 있었다. ‘가톨릭의 총본산 로마에도 거리를 떠도는 집시와 노숙인들이 많은데, 이들도 우리 형제들이고 우리가 도와야 하는 이웃’이라는 점이다. 이때부터 박형지 수녀가 성 베드로 광장을 자주 다니며 노숙인들의 실태를 알아보고,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이어지는 로마 노숙인 급식 봉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성 베드로 광장에 있던 화장실을 고쳐 노숙인을 위한 샤워장이 만들어진 뒤에는 매주 토요일 샤워장을 이용하는 노숙인들에게도 식사 한 끼를 건네고 있다.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이 ‘바티칸 노숙인들의 벗’으로 강렬하게 인식된 계기는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초반 로마 전역에 내려진 이동제한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로마에서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로마시내 노숙인들을 돕던 여러 단체들이 활동을 중단했고, 거리에는 어쩌다 보이는 시민들보다 단속하는 경찰들이 더 많을 때였다.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갔다. 한 끼의 식사를 애타게 기다리며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경찰들도 처음에는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을 제지하다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을 실천하는 수도자들의 진심을 본 뒤에는 활동을 허용했다.

로마 꽃동네 수도자와 봉사자들이 8월 26일 로마 브라베타(Bravetta)가에 위치한 수녀원에서 노숙인들에게 나눠줄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이 8월 25일 노숙인들에게 저녁을 나눠 주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마음을 치유하는 약

성 베드로 광장 주변을 돌며 노숙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던 수도자들이 로마 ‘천사의 성’으로 연결되는 다리 밑을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다리 밑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더니 수도자들에게 다가왔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이 남성은 세상 누구와도 마주하기를 꺼려하고 오직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에게만 마음을 열고 있었다.

노숙인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 상처가 유독 커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가는 노숙인들이 있다.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은 이들을 위해 한 번 더 마음을 쓴다. ‘천사의 성’ 다리 밑 노숙인은 몸도 성하지 않아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병원 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수도자들은 그 노숙인에게 밥과 함께 치료에 필요한 약을 건넸다. 이 약은 ‘천사의 성’ 다리 밑 노숙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그를 세상과 연결하는 마지막 가교나 다름없었다.

로마 꽃동네는 노숙생활조차 불가능한 이들, 막다른 곳까지 내 몰린 이들을 “우리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로마 브라베타(Bravetta)가에 위치한 수녀원으로 데려와 돌본다. 월세로 입주한 비좁은 수녀원에 지금은 80대 독일 할머니와 브라질 ‘조세 아저씨’가 정성스런 돌봄을 받으며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누군가 돕지 않으면 하루도 더 지낼 곳이 없는 이들이다.

노숙인을 같은 형제로 대하는 로마 꽃동네 수도자들은 “우리를 도와 달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로마에서 유학하는 사제와 수도자, 한인 신자들이 알음알음 찾아와 돕고 있다. 박형지 수녀는 “이 삶이 쉽지 않아도 우리와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분들이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로마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