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제1회 학술발표회, 조선교회 자립 꿈꿨던 여항덕 신부 노력 재조명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9-20 수정일 2022-09-20 발행일 2022-09-25 제 3311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1830년대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
‘서양우월주의’ 벽 부딪쳐 좌절
“자치 교회 지향한 파격” 평가

9월 17일 서강대학교 김대건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제1회 학술발표회에서 수원교회사연구소 이석원 연구실장이 발표하고 있다.

조선교회의 자립을 위한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余恒德·파치피코)의 노력을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여 신부의 야심찬 계획은 서양인 신부들과의 갈등으로 좌절됐는데, 이는 서양우월주의적 시각 속에 동아시아인 사제의 역할이 축소됐던 1830년대 당시 교회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회장 신의식 멜키올)은 9월 17일 서강대학교 김대건관 국제회의실에서 제1회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중국근현대사학회와 공동 주관한 학술발표회에서 수원교회사연구소 이석원(프란치스코) 연구실장은 ‘1830년대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과의 갈등: 조선대목구의 관할 주체와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이같이 전했다.

여항덕(조선식 이름 유방제) 신부는 주문모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신부다. 1834년 조선에 도착한 여 신부는 3년간 사목활동을 했다. 여 신부는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도와주는 보조적 역할로 조선에 파견됐으나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에 필요한 최선의 선교 방책을 찾고자 했다. 이 연구실장은 “여 신부는 조선 신자들과 논의한 끝에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대리 주교에게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을 제시했으며 또한 장기적인 안목 아래 조선교회의 관할권 문제(조선인 자치)까지 언급했다”며 “한편 서양인의 존재가 조선교회에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밀입국을 만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여 신부의 행위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월권, 불복종으로 인식됐고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그를 ‘음흉하고 무모한 중국인 사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범죄자’로 부르기도 했다. 결국 여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순명해 그의 조선 입국을 준비했다. 이 연구실장은 “여 신부의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은 궁극적으로 조선인 사제와 조선인 신자로 구성된 자치 교회를 지향한 매우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여 신부는 중국으로 귀환할 때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선발한 세 명의 조선인 신학생과 동행, 조선인 사제가 탄생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 따르면 그 전에는 북경이나 마카오에 조선 청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조선 신자들이 여 신부가 입국한 이후 그 필요성과 가능성을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연구실장은 “조선인 사제가 나와야만 조선교회가 끊어지지 않고 천주교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는 여 신부의 주장이 조선인 사제 양성에 소극적이던 조선 신자들을 설득시킨 결과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