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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1)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보낸 열다섯 번째 서한②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8-10 수정일 2022-08-10 발행일 2022-08-14 제 3306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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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 현실 수준에 맞는 선교정책 필요성 피력
믿음을 위해 부와 명예 버린 김 베드로
사제 보자마자 대성통곡하는 광경부터
종일 경문 외우고자 애쓰는 노인들까지
꿋꿋이 하느님 따르는 신자들 모습 그려

하느님을 믿기 위해 험악한 산골에서 숨어 지내며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던 신자들에게 사제의 방문은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사진은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에 설치된 스테인드 글라스. 정웅모 신부 제공

잔혹한 박해는 잦아들었지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시기. “머지않은 미래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고 예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고 밝힌 최양업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장밋빛 미래를 그려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만나는 신자들은 하느님을 믿기 위해 가진 것을 잃어야 했고, 험악한 산골에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열다섯 번째 서한에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용맹하고 굳세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 하느님 믿고자 시골뜨기의 삶 선택한 김 베드로

중국 최고 통치자를 도운 공로로 큰 벼슬을 받은 김씨 장군의 둘째 아들인 김 베드로. 최양업은 이번 서한에서 부와 명예를 버리고 용맹하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인물로 김 베드로를 소개한다. 최양업은 “김 베드로는 스물네 살이 될 때까지 온갖 악덕을 저질렀고 주색잡기로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전했다. 그러다 김 베드로는 신앙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들을 보고 천주교에 무슨 위력이 있음을 깨닫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자신의 친구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친구가 천주교 신자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찾으러 길을 떠났다. “김 베드로는 자기 친구와 그 마을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 그날로 천주교 진리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됐습니다. 즉시 천주교에 입교할 결심을 세우고 다음날부터 주님의 기도, 성모송, 천주십계,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을 배워 암송했습니다.”

김 베드로는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했으나 모친을 비롯한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가족들의 엄포에도 김 베드로는 전혀 겁내지 않고 “저는 어머니와 형님 손에 기쁘게 죽을 각오가 돼있습니다”라며 “그러나 만일 저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저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지도 않으시다면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서울 집을 떠나 복음을 들었던 마을로 갔다. 최양업은 “이리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갑자기 부자에서 가난뱅이가 됐고, 교만한 양반에서 비참한 시골뜨기로 변했다”고 전했다.

■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세대를 막론하고 하느님 공경에 힘쓰다

1857년 9월 14일 불무골에서 보낸 서한에서 간월이라는 마을에 찾아온 청년의 깊은 신심에 대해 적은 최양업은 이후 그와 만난 일화를 소개한다.

“청년은 자기 마을에 공소집을 차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가 약속한 그해에 제가 새 공소집에 도착하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최양업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교우들은 목 놓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눈물은 얼굴과 옷을 적셨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외롭고 힘든 상황을 견뎌냈을 신자들에게 사제의 방문은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신자들을 진정시킨 최양업은 또 한 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겨우 8~10세밖에 안 된 어린 꼬마들이 교리문답 전체와 굉장히 긴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경문을 청산유수로 외우는데 그 광경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특히 노파들은 재능도 부족하고 기억력도 흐려서 종일 경문을 배우면서도 한마디도 입에 담지 못해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습니다.”

1857년 3월 열린 제1차 조선대목구 성직자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해 8월 2일 한글 사목 서한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가 반포됐다. 이 서한에는 예비신자나 신자들이 조만과(早晩課, 아침·저녁기도) 등 요긴한 경문(기도문)과 함께 삼본문답(영세·고해·성체문답)을 비롯해 견진문답을 배워 익혀야 한다는 규정이 수록됐다. 당시 예비자들은 세례를 받으려면 긴 교리서를 외워야 했고 특히 나이가 많은 노인들에게 큰 어려움이 됐음을 최양업의 서한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최양업은 신자들의 현실 수준에 맞는 선교정책이 필요하다고 서한을 통해 피력한다.

“그해 예비교우들이 상당히 많아서 400명이 넘었으나 영세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교님께서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지 못한 자에게는 세례성사를 주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다수는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합니다.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공부를 하여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