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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8)최양업 사목 당시 천주교 교세와 신자들의 신분 구성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7-12 수정일 2022-07-12 발행일 2022-07-17 제 330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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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대부분 피지배층… 계급갈등으로 분열 되기도
전국 방방곡곡 사목순방 시작하면서
신자 수 꾸준히 증가해 교세 확장돼
병인박해 이후로 상인층 급격히 늘고
일부 양반 제외 상민·천민 등으로 구성

다블뤼 주교가 신리 교우촌에서 신자들과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모습. 이종상 화백 作.(대전교구 신리성지 순교 미술관 소장)

1850년 초, 조선에 도착해 사목을 시작한 최양업은 시골 방방곡곡을 다니며 신자들과 만난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파리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최양업 신부의 사목 구역에는 서양인이 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들어가기 힘든 수많은 마을이 포함돼 있었다”고 할 만큼 최양업의 사목순방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조선에 도착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인 1850년 10월 1일 쓴 서한에서 최양업은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며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0리를 걸어 다녔다”고 전한다. 고되고 긴 여정이었지만 결과는 값졌다. 최양업이 사목순방을 시작한 시기에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이다.

■ 최양업 사목할 당시 천주교 교세

최양업이 사목순방을 시작한 첫 해, 그가 순방한 교우 수는 3815명에 달한다. 이 중 성인 영세자와 유아 영세자가 각각 181명, 94명이었고 예비신자로 등록한 이들은 278명이었다. 이듬해인 1851년 10월 15일 보낸 서한에도 최양업이 집행한 성무가 상세히 보고된다.

“사규고해자가 3620명이고, 영성체자가 2753명이며 재고해자가 235명이고 재영성체자가 220명입니다. 그리고 성인 영세자가 197명이고 예비신자로 등록된 이가 229명, 유아 영세자가 54명입니다.” 사규고해(四規告解)는 천주교 신자가 지켜야 할 네 가지 법규 즉 ▲주일과 의무축일 미사 참례 ▲최소한 1년에 한 번 고해성사 ▲지정된 날 금식과 금육 ▲최소한 1년에 한 번 부활시기에 영성체할 것을 고찰하는 고해성사를 말한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가 조선에서 첫 사목을 시작한 해인 1850년 11월에 한국 천주교회는 공소가 185개 이상 있었으며 예비신자를 포함한 신자 수는 1만1000명 이상을 기록했다. 이후 그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1851년 1만2000명이었던 신자 수는 1855년 1만3638명으로 늘어났고, 1861년에는 1만8035명으로, 10년 만에 50%가량 교세가 확장됐다.

1850년 375명이었던 성인 영세자 수도 꾸준히 증가해 1855년 이후로는 500명을 웃돌았다. 1861년에는 750명 이상이 영세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교세 증가의 이유에 대해 “공식적인 박해 중단과 평화로운 신앙생활, 그리고 최양업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에 배경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1859년 10월 13일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중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준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선 조정은 공적으로 대놓고 우리 신자들을 박해하지 않는 듯합니다”라는 최양업의 글을 통해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1857년에 최양업과 함께 활동한 선교사는 5명이었고 선교영역이 확대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 신자들의 신분 구성

최양업은 1854년 11월 4일자 서한에서 “우리 포교지는 신자들 중에서 신분의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여 분열이 일어나므로 큰 걱정”이라며 “그리스도교 신덕과 형제애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되고 비건설적으로 소모되고 있다”고 밝힌다. 조선사회에 뿌리깊은 계급갈등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문제가 된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 즉, 초기 교회 때는 중인과 상민, 천민을 포함한 피지배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가 펴낸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에 따르면 1784~1801년까지 신자들의 신분은 양반이 122명으로 20.61%를 차지했고 중인이 37명(6.25%), 상민과 천민, 신원 미상인 신자들은 총 433명으로 전체의 73.59%를 차지했다. 이러한 흐름은 최양업이 사목할 시기까지 이어진다. 이후로도 증가세를 보이던 상민층 점유율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로 급격히 늘어났고 양반층은 274명으로 7.89%에 불과하고 나머지 91.83%는 상민과 천민, 신원미상인 신자들로 구성됐다.

이처럼 실제로 신자들의 구성이 피지배층으로 이뤄졌기에 최양업은 그들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었고, 하느님이 가르쳐 준 형제애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