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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4)여성 신자들의 깊은 신심, 최양업을 통해 전해지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6-15 수정일 2022-06-15 발행일 2022-06-19 제 329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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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삶 속에서 하느님 향한 용기는 더 빛나
유교 문화 안에서 제약 많았던 여성들
비참한 현실 견디며 꿋꿋이 신앙 지켜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삶 살기 위해
동정생활 결심한 여성 신자들도 많아

윤점혜 아가타가 동정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은 탁희성 화백 작품.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 통용되던 조선시대. 남자 선교사가 부녀자들에게 선교하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여자는 남편의 허가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고 거리에 눈길을 던질 수조차도 없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 부인들은, 더군다나 박해 때는 성사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었다. 외간 남자의 손이 닿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딸을, 남편이 아내를 죽이기도 하고 여자가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최양업의 서한에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많은 여성 신자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최양업은 이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한 이들의 깊은 신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지를 서한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 여성들의 비참한 삶, 서한을 통해 전한 최양업

103위 성인 중 47명, 124위 복자 중 23명이 여성이다. 시복시성된 순교자 중 30%에 달하는 수치다. 이들이 순교하기까지 얼마나 비참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는지 최양업의 서한을 통해 잘 드러난다. 양반 출신인 안나라는 여교우에 대해서 “19년 동안 철저히 외교인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안나는 마을 전체가 온갖 미신을 숭상하는 곳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혼자서 신자의 본분을 조금도 궐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최양업은 전한다.

과부들의 상황은 더욱 비참했다. “과부가 되면, 비록 혼인한 지 하루 만에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수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재혼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의 불명예로 말미암아 온 가문에게도 망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들은 항상 밤에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밤길을 다니는 모험 중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향한 이들의 용기는 더욱 빛났다. 최양업은 서한에서 “마을 유지의 부인은 남편에게서 엄포와 공갈과 매질과 핍박 등 온갖 괴로움을 당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굳세게 저항해 신앙을 보존했다”고 전하는가 하면 “배교하지 않으면 관가에 고발해 죽게 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그리스도의 충실한 여종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죽기로 마음먹고 재판소인 관가로 끌려갔다”고 밝혔다.

복자 심아기 바르바라.

복자 정순매 바르바라.

■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자 한 여성 신자들

당시 사목을 하던 최양업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느님을 더욱 열렬히 섬기고자 동정을 결심하는 여성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서 동정생활은 큰 불효로 여겨졌다. 또한 남편이 없으면 납치될 위험이 있었기에 최양업은 이들에게 동정생활을 권하기 어려웠다. 최양업은 서한에서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할 염려가 있기에 동정생활을 찬양하는 설교자인 우리 사제들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권유하거나 강제로 명령하는 자가 되어야 할 지경”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조선 후기 천주교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동정으로 성화하고 복음 선포를 위해 하느님 일에 헌신적으로 뛰어든 수많은 동정녀들이 생겨났다.

복자 윤점혜(아가타)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해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고, 복자 심아기(바르바라)·정순매(바르바라)도 동정서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허가와 혼인하였다가 과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과부 행세를 했던 정순매는 24세 나이로 순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천주교 신앙을 너무나 좋아하여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1801년 순교한 복자 윤점혜는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었다.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제안으로 공동체를 꾸린 윤점혜는 다른 동정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했다고 전해진다.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던 윤점혜는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