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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희 대주교의 북한교회 이야기」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5-17 수정일 2022-05-18 발행일 2022-05-22 제 3295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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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 잡고 미사 가던, 그리운 北 진남포
 나고 자란 고향 이야기부터
 공산군 종교 탄압 겪었던
 6·25전쟁 당시 경험 구술
윤공희 대주교 구술/권은정 글/344쪽/1만8000원/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항구도시 진남포. 이곳에서 나고 자란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어린 시절, 매일 새벽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진남포성당으로 향했다. 라틴어로 거행되는 미사에 뜻도 모르고 문장의 앞머리만 외워 우물쭈물하다가 마치기도 했던 여덟 살 된 복사. 이 소년은 훗날 대주교가 됐고,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힘썼다.

72년 전 일어난 민족의 아픈 역사인 6·25전쟁은 이제 먼 과거의 일이 됐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소장 강주석 베드로 신부)는 한반도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실현하고자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 구술사 채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 두 번째 구술사는 윤 대주교의 입을 통해 완성됐다. 일제의 폐교 위협에도 학교를 지키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진남포본당 주임 스위니 신부를 보며 사제의 꿈을 키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가는 길을 배웠던 덕원신학교 신학생 시절,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 확산된 종교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일까지. 윤 대주교는 70여 년 전 북한교회의 현실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1942년 덕원 소신학교 졸업기념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공희 대주교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제공

1949년 봄, 한밤중에 수도원 주교 아빠스와 교장 신부, 수도자들이 연행됐고, 덕원신학교는 강제 폐쇄됐다. 막 차부제품을 받은 윤 대주교는 주변의 사제들이 사라지는 일을 목격했다. 윤 대주교는 당시 상황을 “공산당이 시시각각 초를 다퉈 교회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에 평양교구 존립을 위해 1950년 1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은 윤 대주교는 월남한 지 두 달 만에 덕원신학교 동기인 장선흥(라우렌시오) 부제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던 수도 서울을 1950년 9월 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했다. 승리의 군가를 부르며 북으로 향한 유엔군과 국군. 윤 대주교도 메리놀 외방 전교회 패트릭 클리어리 신부 일행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진남포본당에서 윤 대주교는 공산당의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성당을 지킨 교우들과 만났다. 감동의 눈물,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윤 대주교를 맞이했던 교우들은 그날 이후로 다시 볼 수 없었다.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온 윤 대주교는 1963년 주교로 수원교구장 주교로 서품됐고, 이후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거쳐 1973년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되며 대주교로 승품됐다.

한반도의 격동기를 겪은 윤 대주교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 안에서 살아온 삶”이라고 말한다. 고향을 떠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한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로 쉼 없이 걸어온 윤 대주교의 삶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윤 대주교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전한다.

“나의 고향 진남포, 그리고 신학교가 있었던 함경남도 덕원군은 올해도 가지마다 푸른 잎을 달고 나뭇가지는 하늘로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북한 지역의 교우들의 믿음도 그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북녘 하늘 아래서 하느님을 찾는 교우들 역시 우리와 한 형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