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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6)1855년 10월 8일 배론에서 보낸 열한 번째 서한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4-19 수정일 2022-04-20 발행일 2022-04-24 제 329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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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 순교 받아들인 부모의 신심 되새기다
가렴주구 극심한 조선의 부조리 비판
비참하고 궁핍한 백성들 처지에 통감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의 요청으로
최양업 부모의 순교 행적 세세히 적어

배티성지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와 부모님의 흉상. (왼쪽부터)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의 열한 번째 서한은 배론에서 쓰였다. 일찍이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골인 배론에 모여 살았고,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들어온 황사영(알렉시오)은 이곳의 옹기토굴에서 백서를 썼다고 전해진다. 충청도 지역을 관할했던 최양업에게 배론은 중요한 사목지 중 하나였다. 특히 1855년 초에 세워진 성 요셉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을 돌보고 지도하고자 배론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해 10월 8일 최양업은 배론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한 통의 서한을 부친다. 이 서한에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모님의 순교 행적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회관은 최양업의 서한 전반에 나타난다. 피지배층이 대부분인 신자들의 가난과 궁핍은 사제인 최양업에게 큰 아픔이었고, 조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귀국 후 처음 쓴 서한에서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진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던 최양업은 5년이 지난 뒤에도 변하지 않은 조선 사회를 지켜보며 분통한 감정을 드러낸다.

당시 양반, 특히 영세를 받은 양반들조차 일하지 않고 횡령과 사기, 착취로 살아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최양업은 “우리는 저들이 입교해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면 하느님의 법에 따라 이전의 방탕한 생활을 버리도록 강요하지만 그들은 정직한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유익한 전문 기술이 전혀 없거나 전문 기술자가 될 소질이 없습니다”라며 “영세를 한 뒤 처음에는 다른 이들보다 굳세어 보였습니다만, 지금은 다른 이들보다 더 쉽게 무성한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 시들어 버렸습니다”라고 전한다.

무능한 대신들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가련한 처지도 토로한다. 당시 교자(가마) 타는 것을 금하는 법률이 제정돼 이를 어겨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야했던 백성들. 최양업은 “이런 예를 볼 때 신부님은 이따위 정치인들이 다스리는 정부가 얼마나 한심하고, 또 이런 못난 사람들에게 통치되는 불쌍한 백성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상상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라고 적는다.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 박물관’에 전시된 고문에 사용된 형구들.

■ 평안한 모습으로 하느님 곁으로 돌아간 최양업의 부모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로 조선의 신학생들을 교육했던 르그레즈와 신부는 1837년 마카오로 유학 온 최양업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1860년까지 최양업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교회의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전달해 온 그는 최양업 부모의 순교 행적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최양업에게 요청한다. 이후 부모님의 체포부터 투옥, 고문, 순교 등에 대한 경위를 알고 있는 증인들을 물색한 최양업. 그는 어렵게 찾아낸 증인들의 증언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전한다.

“아버지가 죽었을 당시 함께 수감됐던 신자는 ‘프란치스코가 마지막 고문으로 반죽음을 당하여 감옥으로 운반돼 왔습니다. 차츰 정신을 되찾아 신음하면서 자기와 함께 체포됐다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자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매우 슬퍼했습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배교할 것을 염려해 형장에 오지 말 것을 당부한 최양업의 어머니 이성례. 이 때문에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증인을 찾을 수 없었던 최양업은 어머니가 감옥에서 교리를 가르쳤던 하인 한 명의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그 하인은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믿었고 형장에까지 따라가서 마리아가 흔연한 낯으로 처형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고, 또 그 이야기를 아들 야고보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의 마지막 순간은 평안하고 흔연했다. 부모님의 순교 행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했을 최양업은 부모님이 기쁘게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신앙을 다시 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을 만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