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상)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2-04-13 수정일 2022-04-13 발행일 2022-04-17 제 329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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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수녀회 창설 후 1954년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열린 첫 서원식 모습.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공

“사랑에서 태어나고, 사랑 위해 생겼으니, 우리 본(本)은 사랑이요, 목적도 사명도 사랑일세.”

그 어떤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시대에 태어난 방유룡 신부(레오, 1900~1986)는 1930년 10월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뮈텔 대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 사랑에 더 다가가기 위해 수도자가 되길 원했으나, 당시 한국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수도회밖에 없었다. 이에 방유룡 신부는 한국인 심성과 정서에 맞는 수도회, 즉 이 땅에서 하느님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한국인 설립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방유룡 신부는 해방 후 첫 주님 부활 대축일이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46년 4월 21일 개성본당에서 그동안 준비해 왔던 최초의 한국인 설립 수도회를 창설했다. 공동창설자인 윤병현(안드레아) 수녀와 홍은순(라우렌시오) 수녀는 수도복으로 가장 가난한 차림인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수도회의 역사를 함께 시작했다.

한국 수도생활의 맥은 신앙 선조인 한국 순교자의 얼을 이어가는 것이라 하여 수도회의 이름을 한국순교복자수녀회로 명명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교정신과 형제애로 복음선포’를 수도회의 목적으로 삼으며 한국 순교자들을 수도회의 주보(主保)로 삼았다.

수도회 창설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산정권으로 인한 정치 상황이 심각해져 개성본당과 첫 수도공동체를 이뤘던 보금자리를 떠나 1950년 3월에 서울 청파동으로 본원을 이전했다. 곧이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수도회 뿌리를 내리는 초창기에 닥친 전쟁과 피난살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수녀들은 흩어지지 않고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전쟁 때의 폭격으로 무너진 청파동 본원을 수리하며 수도회 재건에 전념을 다했다.

누구나 어려웠던 그 시절에 수녀들도 재정 자립을 위해 인형과 조화를 제작해 팔기도 했지만, 1954년에는 첫서원을 한 홍은순 수녀를 제2대 수련장으로 하여 자체 양성 기반을 마련할 정도로 수도회가 튼튼해졌다.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나자, 공의회 정신에 따라 살기 위해 수도복장을 간소화했으며 2007년에는 회원 수가 많아진 공동체 내의 소통과 친교를 증진시키고자 대전관구와 수원관구를, 2009년에는 미주지부(미주준관구 전신)를 설립했다.

또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수도회로 시작했지만 수도회의 카리스마가 보편교회에 선물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21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는 교황청의 인준을 받아 ‘성좌 설립 수도회’로 새롭게 태어났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