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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5)13년 만에 귀국한 최양업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1-26 수정일 2022-01-26 발행일 2022-01-30 제 328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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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신자들 도울 능력이 없어 가슴 미어집니다”
10개월간 쉬지 않고 사목방문 매진
산 속에 숨어 사는 신자들 만나며
비참하고 가련한 삶에 깊이 통감
평생토록 사제를 만나고 싶어했던
교우촌 신자들의 모습 서한에 묘사

최양업 신부가 일곱 번째 서한을 작성한 도앙골 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드디어 오랫동안 소망하던 때가 왔습니다.”

사제가 돼 13년 만에 귀국한 최양업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5살에 조선을 떠나 28살 청년이 돼 돌아온 최양업.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신자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목숨을 잃는 신자들을 본 최양업의 심정이 어땠을까? 귀국 후 10개월 만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최양업의 편지에는 신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제로서의 비장함이 배어 있다.

비참하고 궁핍한 신자들의 삶, 가슴에 새기다

“너는 큰 도둑놈이다. 우리를 이렇게 소란스럽게 하고 속이는 것이 너희에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신자들과 만나기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최양업이 이 같은 욕설과 협박의 말을 듣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최양업은 자신이 겪는 수모보다 마을에서 쫓겨나 신자들과 만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것을 더욱 가슴 아파했고, 신자들의 실망과 한숨을 가슴에 새겼다.

최양업이 조선에 돌아와 10개월간 사목방문을 하며 만난 교우 수는 3815명이며, 그 중 2401명이 고해성사를 받았다. 또한 175명이 영세했고 그 중 50%는 유아 영세자였다. 당시 신자들이 주로 험준한 산속에 숨어 살았던 것을 감안하면 최양업이 쉬지 않고 전국을 다니며 신자들과 만났음을 알 수 있다.

먼 길을 걸어 도착한 교우촌에서 만난 신자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비참했다. 신앙을 위해 안락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 속에 숨어들어야 했던 신자들. 하지만 최양업이 만난 신자들의 얼굴에는 좌절이 아닌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됐을 것이다.

최양업의 편지에는 그들의 가련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합니다. 그럴 때마다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동포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양반층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천주교는 병인박해기(1866년~1873년)에 들어서 상민(양인)층의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천주교 수용의 저변이 확대됐다는 분석과 함께 양반층이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요인이 작용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최양업의 서한에도 드러난다.

“양반들은 가족 중의 어떤 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의 가문 전체가 불명예로 낙인이 찍히고, 그 집안의 모든 영광과 모든 희망이 걸려 있는 양반의 칭호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많은 신자들에게 크나큰 악표(나쁜 표양)가 돼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회가 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치욕 속에서 영광을 찾기보다는 헛된 칭호를 누리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1850년 10월 1일 도앙골에서 보낸 서한.

신자들에게 큰 은총의 순간, 사제 최양업과의 만남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 중에 사제에게 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을 터. 최양업의 일곱 번째 서한은 그가 만난 교우촌 신자들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교우촌을 떠날 때에는 우리가 여행할 옷차림으로 갈아입을 때부터 공소집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탄식소리로 진동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이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그들의 애정의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어떤 때는 좀 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야산 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 당시 신자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면 그것이 큰 은총’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신부와의 만남을 기뻐하며, 떠나는 최양업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봤을 신자들. 최양업은 신자들이 눈물을 훔치며 흔드는 손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