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신앙의 씨앗, 싹을 틔우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1-12-29 수정일 2021-12-29 발행일 2022-01-02 제 3276호 18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15세에 마카오로 떠난 소년… 신앙만이 그를 지켰다

성인 최경환·복자 이성례의 장남
신학생으로 선발돼 고국 떠나 공부
마카오에서 5년 동안 가르침 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 보내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쓴 소팔가자의 모습. 김대건 성인 동상은 세워져 있으나 최양업 신부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844년 5월 19일 소팔가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한 해에 7000리.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지금으로 따지면 1년 동안 2700여㎞에 이르는 거리를 걸으며 신자들과 만났다.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신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쥐었던 최양업 신부. 그의 발자국에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조선의 신자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서려있다.

특히 최양업 신부가 남긴 20통의 서한에는 한국 신자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사목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22년 한 해 동안 최양업 신부의 서한을 중심으로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겪은 사건들을 살펴본다. 최양업 신부 시복을 염원하며 양업교회사연구소와 함께하는 이 기획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과 그가 사목했던 당시의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그의 발걸음에 서린 눈물과 사랑, 그리고 신앙의 증거들을 찾아본다.

간절한 소원 담아 마카오·소팔가자에서 보낸 편지

1842년 4월 26일부터 1860년 9월 3일까지 최양업 신부가 작성한 서한은 21통으로 추정된다. 분실된 서한을 제외하고 현재 20통의 서한이 남아있다. 마카오와 소팔가자, 심양, 홍콩, 상해 등 해외에서 보낸 서한이 6통이며 조선에 돌아와 14통의 서한을 보냈다. 최양업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4통의 편지를 썼으며, 리브와 신부와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각각 4통, 2통의 서한을 전했다.

“저는 하루라도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신부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일은 없다고 망설임 없이 고백합니다.”

최양업의 첫 번째 서한은 르그레즈와 신부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된다. 고국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최양업에게 스승 신부들의 보살핌이 큰 위로가 됐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또 마침내 유일한 동료 안드레아와도 떨어져 나는 작은 방에 외톨로 남아있습니다마는 하느님과 홀로 있기가 소원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했던 깊은 신심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신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은 신학생 시절부터 깊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서한을 보내고 2년 뒤 소팔가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두 번째 서한에서 최양업은 이렇게 전한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마치 아벨의 피처럼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또한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며 하루빨리 조선의 신자들과 함께할 수 있길 소원했다.

부모님이 순교하고 조선 교우들이 모진 박해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타국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최양업. 그 애끓는 심정을 편지 한 통에 담을 수 밖에 없었던 최양업은 더욱 단단하게 자신의 신앙을 다졌다.

조선 최초 신학생으로 선발된 15살 소년

최양업은 1821년 3월 1일에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에서 아버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어머니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집안의 장남이었던 최양업은 부모가 물려준 신앙의 씨앗을 단단하게 키워나갔다. 1835년 11월 22일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인 사제 모방 신부는 세 명의 충청도 출신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했고, 그 중 하나가 최양업이었다. 이제 막 15살이 된 소년 최양업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났다. 서울에서 출발해 변문, 중국 대륙을 횡단해 도착한 마카오. 1836년 12월 서울에서 출발한 3명의 신학생은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이 돼서야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학교에서는 파리 외방 선교회 극동 대표부의 책임자였던 르그레즈와 신부, 부책임자 리브와 신부를 비롯해 베르뇌 신부, 메스트르 신부 등 선교사들이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마카오 신학교에 머문 기간은 1837년부터 1842년까지 5년가량.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떠난 최양업은 그해 11월 만주 지역의 교우촌인 소팔가자에서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최양업의 첫 번째 서한은 마카오를 떠나고 2달 뒤에 작성됐다. 5년간 동고동락하며 깊은 정을 나눴던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첫 번째 서한에는 르그레즈와 신부를 향한 그리움, 조선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씨앗을 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