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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다시 보기] 1. 신앙과 영성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1-08-31 수정일 2021-08-31 발행일 2021-09-05 제 3260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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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 수없이 넘기며 양들에게 희망 전한 ‘착한 목자’ 
이름 그대로 ‘선한 업적’ 남겨
어려운 시대 가난한 신자에게
직접 체험한 은총 전해주고
한문 교리·기도서 한글 번역
조선 계급주의 한계 뛰어넘어

청주교구 배티성지 최양업신부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구계숙 수녀 작품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는 한국인 두 번째 사제다. 최양업 신부는 사제가 된 1849년부터 선종한 1861년까지 조선에서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고 조선 방방곡곡을 끊임없이 걸어 다니며 사목을 펼쳤다. 그가 한국 땅에 남긴 신앙유산의 중요성과 무게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최양업 신부는 올해 탄생 200주년과 선종 160주년을 맞고 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신앙과 영성을 되짚어 본다.

■ 최양업의 이름은? 출생일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해는 그 이름과 출생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원주교구 배론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 묘비에는 ‘사제도마최정구지묘’(司祭篤瑪崔鼎九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도마’(篤瑪)는 최양업 신부의 세례명 토마스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묘비에는 ‘양업’이라는 이름이 없고 ‘정구’로 기록돼 있어 의문이 든다. 일부 문헌에도 최양업 신부의 아명(兒名, 아이 시절 이름)이 정구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구(鼎九)는 ‘구정’(九鼎)을 오기한 것이다.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이에 대해 “최양업 신부님 조카인 최상종(빈첸시오)이 착오로 정구라고 증언한 것에서 오류가 비롯됐다”며 “최양업 신부님 남동생들 이름이 희정(羲鼎), 선정(善鼎), 우정(禹鼎), 신정(信鼎) 등인 것을 봐도 최양업 신부님 이름은 구정(九鼎)이 맞다”고 말했다. 실제 경주 최씨 세계(世系)에는 최양업 신부가 ‘장자 구정’(長子 九鼎)으로 올라가 있다.

그렇다면 ‘양업’은 어떤 이름인지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차 박사는 “양업은 아명, 구정은 보명(譜名, 족보상 이름)”이라고 밝혔다. 차 박사는 “구정이 관명(冠名, 관례를 치르고 받는 이름)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교회사학자 원재연(하상 바오로) 박사는 ‘양업’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님이 15세 무렵 받은 관명으로 봐야 하고 관명 전에 쓰던 아명은 따로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다.

최양업 신부 출생일로 알려져 있는 ‘1821년 3월 1일’ 역시 문헌이 아닌 집안의 전승에 근거하고 있다. 차 박사는 “최양업 신부님이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했다는 사실은 사료에 기록이 있어 명확하다”면서도 “출생일은 1821년 초 혹은 3월 중일 수는 있지만 3월 1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양력인지 음력인지도 몰라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 이름 그대로 착한 목자 ‘최양업’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최양업 신부가 ‘선한(良) 업적(業)’을 남긴 사제라고 평가했다. ‘선한 업적’의 요소로는 성실함, 끈기, 부지런함, 헌신 등으로 조 신부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자로서의 덕목을 모두 갖췄다고 보았다.

최양업 신부의 사목거점이었던 청주교구 배티순교성지 담임 이성재 신부 역시 최양업 신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로 ‘착한 목자’를 꼽았다. 이 신부는 “유럽에 착한 목자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님이 있다”고 말했다.

최양업 신부는 피를 흘리지는 않았을지라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양들을 찾아간 목자였고 그럼으로써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가 자신들을 찾아왔다는 위안을 주었다. 이 신부는 “신자들 또한 목숨을 걸고 최양업 신부님을 맞이하고 눈물로써 떠나보냈다”면서 “오늘날 사제나 신학생들에게 진정으로 착한 목자상을 제시하려면 최양업 신부님을 보여줘야 하고 그래서 최양업 신부님이 더욱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가난하고 고통받는 신자들에게 땀과 눈물 쏟은 목자

최양업 신부가 사제로 조선에서 사목한 기간은 1849년 말에서 1861년 6월까지 11년 6개월이다. 1849년은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가 몰아친 후 천주교 신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한 생활을 하던 때다.

최양업 신부 시복 청원인 류한영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은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살던 가난한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신 분이었고 자신이 온전히 체험한 하느님의 은총을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전해 주려고 했다”며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고 박해받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언젠가 하느님을 만나기를 바라신 분”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예수님의 생명력이 담긴 십자가에 완전히 일치했던 최양업 신부님은 각자의 무거운 십자가를 진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믿음과 희망을 준다”고 밝혔다.

조한건 신부는 최양업 신부가 여섯 번의 입국 시도 끝에 1849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뒤 6개월가량 쉼 없이 남부 다섯 개 도에 걸쳐 대략 5000리를 사목 순방한 것을 ‘초인적인 힘’으로 표현했다. 조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초인적인 힘은 다름 아닌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천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며 흘린 땀과 눈물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 천주가사와 한글 교리서·기도서 보급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을 방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교리를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차기진 박사는 천주가사를 그 핵심으로 꼽았다. 차 박사는 “최양업 신부님이 한문본 교리서와 기도서인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 한글 번역에 참여하고 이 책들과 천주가사가 신자들에게 널리 보급되면서 조선의 계급주의를 타파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이래은(데레사) 시복분과장도 “최양업 신부님은 계속된 박해로 양반과 중인 신자들이 상당수 순교하고 힘없는 평민들이 교회를 지탱하던 시기에 물질적 도움을 못 주는 애절한 마음으로 천주가사와 교회서적을 보급해 한글을 모르는 평민들과 부녀자들에게 정말 큰일을 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차 박사는 “1864년 11월에 조선교회 신자 수가 1만9000여 명이었고 1866년에는 2만 명을 조금 넘는 정도로 증가해 이 중 절반 가까운 신자가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면서 “최양업 신부님이 남긴 신앙 유산이 교회를 성장시켰고 신자들이 굳은 믿음에서 순교를 택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