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토종 씨앗 보존과 보급에 힘 쓰는 성가소비녀회 용문 나자렛집 생태공동체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1-03-09 수정일 2021-03-09 발행일 2021-03-14 제 3235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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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에게 생명력 없는 씨앗 물려줄 수 없잖아요!”
가톨릭 농부학교 강의 통해 종자 주권의 위기 의식 느껴
토종 작물에 대해 공부하며 양평 일대 다니며 씨앗 수집
씨앗 나눔·모종 판매 행사도
토종 씨앗으로 농사 배우는 제1회 ‘양평 토종학교’ 열어

용문 나자렛집 생태공동체 농사를 도와주러온 수녀들. 용문 나자렛집 생태공동체 제공

“우리 후손들에게 ‘불임’ 씨앗을 물려줄 수는 없잖아요!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건강하고 튼튼한 토종 씨앗을 보존하고 보급하는 일은 창조 질서 보존의 소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경기도 양평 용문성당과 맞붙어 있는 성가소비녀회 용문 나자렛집 생태공동체는 매년 200여 가지 토종 작물 씨를 심고 길러낸다. 1000평가량 땅에 콩, 배추, 무, 토마토, 양파, 파, 호박, 참외, 우엉, 시금치, 근대, 부추, 상추 등 계절별로 우리가 먹는 작물을 거의 다 심는다.

백인선(엠마) 수녀와 김미숙(야고보) 수녀를 비롯한 6명의 수녀들은 야트막한 언덕 2000여 평 남짓한 땅을 야무지게 구획을 나눠 두고, 지금은 계절이 조금 이른 탓에 올 농사를 위해 모종을 키우고 있다. 쌀이 갖는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한쪽 귀퉁이에는 앙증맞게 논도 만들었다.

수녀들이 길러 내는 작물들은 모두 토종 작물들이다. 필요한 만큼 결실을 수확해 자급자족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무료로 씨앗을 나눠 준다. 토종 작물이라고 해서 고대로부터 우리 땅에서 키운 작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0년 이상, 대개 한 세대 정도 씨앗을 받아 증식을 하고 우리 땅과 기후에 적응해 형질이 유지되면 토종으로 친다.

■ 토종과 개량종 함께 심어보니…

오늘날 농사 짓는 데 필요한 씨앗들은 대개 돈을 주고 사서 쓴다. 개량종들은 ‘불임’(不姙)이기 일쑤라서 생산력이 있는 씨앗을 거둘 수가 없다.

“종자 기업들이 파는 씨앗으로 키운 작물들은 나중에 씨를 거둬도 싹이 안 터요. 그러니 매년 씨앗을 사서 농사를 지어야 해요. 농사 짓는 농부가 씨앗 주인이 아닌 셈이지요.”

그래서 엠마 수녀는 양평 일대의 농가들을 찾아다녔다.

“어느 집이든지 한 두 가지씩은 토종 씨앗들을 갖고 있어요. 그 씨앗들을 수소문해서 얻고 수녀원에서 키우고 나눕니다.”

농가에서 토종 씨앗을 갈무리하는 일은 대개 할머니들 일이다. 이유는 ‘맛있어서’였다. 맛만 있는 게 아니다. 토종 씨앗으로 길러 낸 배추와 무로 만든 김치는 오래 둬도 무르지 않는다. 지난해 장마가 길었던 탓에 개량종은 모두 삭아 버린 반면 토종은 척박한 기후를 견뎌냈다. 야보고 수녀의 생생한 체험기다.

“참깨 개량종과 토종을 함께 심었더랬어요. 장마에도 불구하고 개량종은 키도 크고 훤칠해서 토종을 우습게 봤죠. 수확하다 보니 개량종은 허우대만 멀쩡했지 완전 허당이더라구요.”

크고 작은 토종 씨앗들. 매년 씨앗은 무료로 나눠주고 모종은 판매를 하고 있다.

수확되고 있는 토종 고구마들.

■ 종자 주권 위기에 눈을 뜨다

엠마 수녀가 생태사도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여 년 전부터다. 농부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종자 주권이 다국적 종자 기업으로 넘어갔고, 유전자조작농산물이 우리 땅과 식탁에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무와 배추, 고추 등 대부분 농산물들의 씨앗은 절반 이상이 다국적 기업이 그 종자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요. 청양고추 종자도 대표적인 다국적 종자 기업인 몬산토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가장 무서운 전쟁은 ‘씨앗 전쟁’이라고 말한다. 종자 주권을 상실한 나라는 결국 식량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꾸준하게 생태 사도직에 대한 관심을 키워 온 엠마 수녀는 2014년 생태공동체에 다른 몇 명의 수녀들과 함께 지원했다. 지난해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8년 동안 저농약 농사를 지으며 농사를 지어 온 야고보 수녀가 합류해 큰 힘이 되고 있다. 농과대학 출신인 야고보 수녀는 종자 기사 자격증 시험 준비에 한창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가톨릭 농부학교에서 상추와 옥수수 토종 씨앗을 얻어 왔고 홍성군 풀무학교에서 고추, 파, 근대 등 5가지 씨앗을 받아 와 심었다. 토종 작물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토종씨드림’이라는 민간단체로부터 더 많은 종자를 가져다 경작하고 채종했다.

용문 나자렛집 생태공동체 6명의 수녀들은 토종 씨앗 보존과 보급을 통해 생태사도직을 실천하고 있다.

■ 토종 씨앗은 유전자 자원

엠마 수녀는 2018년 7월부터 11월까지 약 5개월 동안 14회에 걸쳐 양평군 동부지역 6개 면 24개 리를 토종씨드림 회원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토종 씨앗을 수집했다. 그렇게 모은 것이 총 38개 작물, 67개 품종, 198점의 씨앗이다. 그 성과가 ‘2018 양평군 토종씨앗 수집보고서’에 담겼다. 2019년에는 지역 농부 및 단체들과 ‘양평군 토종씨앗보존연구회’를 만들었다.

이에 앞서 2017년에는 토종 씨앗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인식으로 워크숍을 마련했고, 하루 날을 정해 수녀원의 씨앗과 토종 작물 밭을 공개했다. 이후 성가소비녀회 본원과 양평 나자렛집 생태공동체를 번갈아가며 씨앗 나눔과 모종 판매 행사를 하고 있다. 모임이 있을 때에는 토종 작물과 온갖 풀로 만든 요리와 놀이로 축제가 펼쳐진다. 다만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모종 판매만 가능했다.

올해에는 제1회 ‘양평 토종학교’를 용문 나자렛집 생태공동체에서 실시한다. 3월 12일에 시작해 11월 27일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하루종일 토종 씨앗으로 하는 농사법, 그리고 자연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참가자들은 각자 텃밭을 분양 받아 수업이 없는 날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아직은 농번기가 아니라 농사일이 바쁘진 않다. 4~6월과 9~11월에는 대개 하루 5시간 이상 밭일을 해야 한다. 원래는 허약한 체질이었다는 엠마 수녀는 “이제는 웬만한 농사일은 장정 몫을 한다”며 웃었다.

예로부터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농부라면, 굶어서 죽을지언정 종자는 남겨 둔다는 말이니 그만큼 씨앗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았다.

“토종 씨앗은 유전자 자원입니다. 작물 개량을 위해서도 그 본래의 다양한 자원을 보존해야 합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서는 안 되듯이,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토종 씨앗 보존과 보급이 중요합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