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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한정현 주교 탄생] 삶과 신앙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0-12-01 수정일 2021-02-16 발행일 2020-12-06 제 3222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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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임에 하느님 뜻 따르도록 해준 “떠나라”는 서품 성구
본당·학업·후진양성 등 여러 사목 환경 두루 경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늘 말씀과 성령 인도 따라
시노드 준비하며 다양한 신자 의견 중요성 깨달아

2000년에 거행된 대전교구 사제서품식에서 한정현 주교(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사제품을 받기 위해 서 있다. 대전교구 홍보국 제공

대전교구 두 번째 보좌주교로 임명된 한정현 주교는 사제품을 앞두고 대품 피정을 하면서, 깊은 묵상 끝에 하나의 성구를 찾았다. 야훼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명하시며, “떠나라”(창세 12,1)고 말씀하신다. 이 세 글자를 한 주교는 자신의 사제서품 성구로 정했다.

■ “떠나라”

“당시 충무체육관에서 서품식이 거행됐습니다. 현수막 길이가 제한돼 있는데, 제 성구가 세 글자밖에 안 돼 동기 신부에게 여분의 현수막을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 농담이지만 한 주교가 사제로서 살아오는 동안 늘 충분하거나 완벽하거나, 또는 과하게 열정적이거나, 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려는 마음을 보여 준다. 한 주교는 여지껏 사제직의 정체를 이 세 글자에서 찾아 왔다.

“제가 있는 자리, 제가 가진 것들이 충분하거나 완벽하더라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늘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 말씀과 열정,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따르려 합니다.”

사제의 삶이 예수님과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완덕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여정에서 완벽함을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사제는 항상 떠나야 한다.

“사제의 길은 늘 부족함을 고백하고 기도하면서, 또한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면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이에 대해 알려 주시는 하느님 말씀에 매순간 귀 기울이고 응답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사제직의 부르심

한 베네딕토(82)·김 아녜스(74)씨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한 주교는 대전교구 서산동문동본당 출신으로 대덕고등학교를 나왔다.

유난히 순교자의 집안이 많은 대전교구, 두 번째 보좌주교로 임명된 한정현 주교는 이른바 구교 집안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어렸을 때 온 가족이 함께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고 별다른 곡절 없이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기는 했다.

왜 사제가 됐느냐 하는 물음에도 한 주교는 “특별한 동기를 들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청소년기에 누구든 겪었음직한, 뭔지 모를 목마름이 있었다. 일종의 공허함, 또는 갈증을 느꼈다.

공부에 열중하고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면서도 뭔가 속을 드러내 모두 내보이고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들이 갑갑했다. 그러던 차에 그런 갈증을 신앙으로 채울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본당 사제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예비신학생 모임에 참석하고 또래 친구들과 서로 가진 고민들을 나누고 귀를 기울이면서 사제직의 소명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모임에서는 사제 성소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도, 사제나 수도자의 권유도 없었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소명이 자연스레 일었다. 이를 두고 선배 주교인 김종수 주교는 ‘신비로운 갈증’이라고 설명했다. 성경 말씀, 친구와 사제나 수도자를 통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마침내는 당신 뜻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손길이다.

■ 혼신을 다한 유학 생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11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한 주교는 혼신을 다해 성서의 언어를 탐구했다. 신학생 시절부터 학부와 대학원에서 구약성서에 매진했다. 논문지도에는 김종수 주교, 당시 총장은 유흥식 주교였고, 성서신학으로 유학을 권고한 이는 경갑룡 주교였다.

한 주교의 성서 공부는 말씀의 의미에 집중됐다. 그러다가 원래의 성서 언어에 매료되기 시작해 성서 언어를 전공으로 삼았다. 석사와 박사과정 모두 구약성서 언어인 히브리어 동사 활용에 대한 학문적 탐구였다.

다만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예기치 않게 찾아온 또 다른 소명으로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박사과정 마지막 3년, 논문에 집중하던 그에게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소속 제3세계 교리교사들의 양성과 영성 지도라는 중책이 맡겨졌다. 로마 성 요셉 신학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생활하다 보니 논문 마무리가 어려웠다.

이에 대해 교구장인 유흥식 주교는 내심 미안함을 표시했다. 교황청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 주교에게 성 요셉 신학원 영성지도를 부탁한 데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한 주교는 그러나 이마저도 “떠나라”는 자신의 사제서품 성구를 되뇌며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 시노드 여정

교구 시노드 사무국장으로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한 교구 시노드 여정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대전교구가 다른 여느 교구들보다도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교구는 대도시, 농어촌, 과학기술 집약적인 지역, 새롭게 조성된 대도시, 행정중심 도시 등 모든 다양한 면을 갖고 있는 교구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다양한 목소리도 있고, 그런 목소리들이 다양하게 청취되는, 함께 공유돼야 할 필요성이 있지요.

나아가 대전교구는 순교 영성에 기반을 두고 예수님 복음의 기쁨을 함께 묵상하고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여정으로서 교구 시노드를 진행했다. 한 주교는 “현재 우리가 지닌 삶과 신앙의 역동적 측면을 함께 성찰하고 희망하면서 하느님 보시기 좋은 공동체로 걸어 나가는 밑거름이 되자는 것이 시노드의 기본 취지”라며 이제 시노드에서 논의된 것들을 어떻게 실제로 구현해 나갈지가 참된 과제라고 말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교구 준비위원회 의전부를 총괄한 한정현 주교가 프란치스코 교황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대전교구 홍보국 제공

한정현 주교가 마지막 사목지인 대전 탄방동본당에서 성체를 나눠주고 있다. 대전 탄방동본당 제공

■ 함께 나눈 기쁨과 영광

한 주교 임명 소식이 발표되던 11월 28일 저녁 대전 탄방동본당 신자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만하다고 입을 모았다.

강현일(클라라)씨는 “놀랐지만 언젠가 더 큰 역할을 하시리라는 기대가 있었다”며 “조금 더 계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가시더라도 주교님을 위해서 항상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당 사목회 김기준(스테파노) 총회장은 “영성적으로 탁월하고 근면하고 겸손하며 무엇보다도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제”라며 “어렵고 힘든 직무를 맡으셨으니 우리들이 모두 함께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맹동술(시몬) 회장은 한 주교에 대해 “모든 일에 엄격하면서도 자애를 갖추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신다”며 “학자 신부님이면서 평신도들을 잘 다독거리고 이끌어 주는 사목자”라고 말했다.

한 주교의 동기 신부들 역시 그를 지혜와 통찰력, 포용력이 있는 사목자이자 벗으로 기억한다. 교구 관리국장 이석우 신부는 “운동도, 말도, 공부도 잘했고 리더십이 있었다”며 “사목과 학문 정진, 후학 양성에 모두 열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사목기획국장 김민희 신부 역시 한 주교를 “영성과 지혜를 겸비한 사목자를 주교로 선물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며 “교구가 한 주교님과 함께 새롭게 희망과 기쁨으로 출발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