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위령 성월에 만난 사람] 한국전쟁 참전·전사한 오빠 유해 찾는 이충호(제노베파)씨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0-11-03 수정일 2020-11-04 발행일 2020-11-08 제 3218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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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오빠 유해 찾아 미사 봉헌하고 싶어요”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존재
미혼으로 참전해 자녀 없어 추모할 사람 없다는 점 슬퍼

이충호씨가 한국전쟁에 참전, 전사해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오빠 이종호씨 사진을 들고 있다. 오빠가 전사 후 받은 충무무공훈장이 앞에 놓여 있다.

이충호(제노베파·88·수원교구 군포 용호본당)씨는 매년 11월 위령 성월을 보내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이 90을 앞두고 제가 살아 온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마지막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전사한 지 올해로 꼭 70년이 되는 친오빠(이종호씨) 유해를 찾아 사제를 모시고 미사를 봉헌하는 일입니다.”

1925년 8월 12일생인 이종호씨는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1948년 입교해 이듬해 임관(군번 14926)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육군 제8사단 21연대 통신대 소속으로 참전했고 개전 초기인 1950년 11월 26일 강원도 양구·화천 전투에서 중위로 전사했다. 같은 해 12월 30일에는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현재는 전사 후 1계급 추서된 ‘대위 이종호’로 미수습 전사자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러나 전사기록과 훈장수여증명서 등 문서 기록만 있을 뿐 유해를 언제 찾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오빠를 1946년에 마지막으로 보고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습니다. 오빠가 미혼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중 전사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습니다. 오빠를 기억하고 추모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오빠 영혼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이씨는 3~4년 전부터 ‘이제 나도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오빠가 이 세상에 남긴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국방부와 관계기관을 방문해 오빠의 군복무 기록과 한국전쟁 참전·전사 기록, 유해발굴감식단 미수습 전사자 기록 등을 신청해 확인했다. 이 기록들을 찾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한국전쟁 중 서울 집에 있던 모든 살림살이가 없어져 오빠 유품은 물론 군복 입은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언제 찍은지 모르지만 오빠가 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어서 오빠가 그리워지면 꺼내 보곤 합니다.”

이씨가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오빠는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존재였다. 이씨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오빠 유해를 찾아 달라고 간청했다. 국가가 나서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청했는데, 찾지 못하고 있어 야속하기까지 했다. DNA 혈액검사와 타액검사도 받았다. 오빠 유해를 수습했을 때 신원 확인에 대비하기 위한 절차다.

“1년 중 군인 주일과 위령 성월이 되면 오빠 영혼을 위로하고 유해를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 절실해집니다. 특히 위령 성월에는 수원교구 성지들은 빠짐없이 다니면서 오빠 유해 수습을 지향으로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마음을 하느님 말고는 누구한테도 하소연할 수가 없습니다.”

이충호씨는 “저는 자식들과 손자손녀들 다 키웠고 신앙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다 돼 있다”며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가슴에 한이 맺혀 돌아가신 어머니 영혼도 위로해 드리고, 꼭 오빠 유해를 찾아서 신부님 모시고 미사를 봉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를 바쳤다.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오빠 유해를 찾게 도와 주십시오. 인자하신 성모님, 하느님께 전구해 주십시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