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투안 공베르 (Antonie Gombert, 1875~1950) 신부
한국명 공안국(孔安國) 신부로도 알려진 공베르 신부는 1875년 4월 25일 프랑스 로데즈 교구 아베롱의 캉불라제에서 태어나 1897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1900년 6월 24일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그해 10월 9일 동생 쥘리앵 공베르(Julien Gombert) 신부와 함께 홍콩 대표부와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성에서 한국말을 배우다가 1901년 공세리본당에서 분리된 안성 8지역에 본당 신설 책임을 맡았다.
안성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사목하면서 앙투안 신부는 지역 사회 발전에도 많은 이바지를 했다. 공소 신자들을 돌보는 한편 병자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프랑스에서 가져온 포도나무 묘목을 보급했다.
1909년 안법초등학교를 세워 자비로 운영하며 지역 아동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중요한 역할로 꼽을 수 있다. 이 학교는 처음 남자아이들을 위해 시작됐으나 1912년 여자아이들을 위해 학급을 추가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일본 경찰에 쫓겨 성당 구내로 피신한 많은 안성 주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던 그는 31년 동안 안성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했다. 1906년 죽음을 앞둔 청년에게 대세를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안성지역 신자들 숫자는 점차 늘었고, 1922년 안성지역 신자 수는 18군데 공소에 퍼져 1600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자들 헌금으로 로마네스크양식의 벽돌 성당을 신축해 1922년 10월 4일 당시 서울대목구 보좌주교였던 드브레(Devred, 1877~1926)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안성본당 사목에 이어 서울 대·소신학교 영적 지도를 맡았던 그는 1950년 7월 15일 동생 쥘리앵 공베르 신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서 체포됐다. 구금된 후에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평양에 호송됐다가 ‘죽음의 행진’에 동원됐다. 75세 고령으로 추위와 눈 속에 180㎞를 걸었던 공베르 신부는 피로와 영양부족 등으로 급속하게 몸이 쇠약해졌고 1950년 11월 12일 중강진에서 선종했다. 이는 증언을 통해 전해졌다.
안법학교는 2009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공베르 신부 흉상을 세워 이웃 사랑과 평화 실천을 높이 기렸으며, 안성본당은 2001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공베르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유해 송환 운동’을 전개했다. 안성지역에 펼쳤던 신앙과 지역 주민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되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또 안성문화원은 2012년 공베르 신부를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