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그날, 우리 교구는(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6-02 수정일 2020-06-02 발행일 2020-06-07 제 319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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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자리잡아가던 한국교회, 다시 무너지다
서울·경기 지역 교회 피해 심각 
시설 파괴와 비품 도난 시달려 이천·여주본당은 소실되기도
공산군이 점령하던 시기에교회는 극심한 감시·탄압 받아 
성직·수도자 다수 체포·살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무력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핏빛으로 물들였고 남북의 분단이 고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올해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다. 특별히 매년 6월은 한국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6월을 맞으며 당시의 수원교구지역 신앙공동체의 상황을 살펴본다.

6·25 전쟁 중 폐허가 된 함경남도 덕원수도원 성당.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대내외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했고, 토지 개혁 사업을 거치면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교회 재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며 점차 교무금이나 봉헌미 등을 내는 등 교회의 정상적인 발전이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벌어진 민족상잔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대규모였던 이 전쟁은 남북한에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많은 불구자와 이산가족, 실향민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에도 큰 타격을 안겼다

북한에서는 전쟁이 발생하기 전날 북한에 남아있던 13명 한국인 신부를 체포했다. 제국주의자들의 첩자라는 죄목이었다. 남한 교회는 전쟁이 터지자 사제들에게 교회를 지키고 사목 활동을 계속할 책임을 맡겼다. 당시 수원교구지역이 속해있던 서울대목구는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사제들이 본당에 남기를 결정함으로써 교회 수호의 의지를 드러냈다.

서울대목구는 전쟁 다음 날인 6월 26일 긴급 교구 참사 회의를 열고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한다’ 등의 방침을 내렸다. 이 내용은 대부분 준수되었고 교회 기능도 상당 기간 지속됐다.

교회와 신자들이 입은 인적·물적 손실은 엄청났다. 시설 파괴도 많았는데, 격전지 인근 지대와 함께 공산군 점령 기간이 길고 전투가 치열했던 서울, 경기, 강원도 지역에 물적 피해가 집중됐다. 수원교구지역의 경우 수원본당(현재 북수동본당) 성당 건물 일부가 파괴됐고 이천본당은 성당이 전소됐고 여주본당도 성당이 소실됐다. 성물과 비품, 가재도구 등은 수도 없이 약탈당했다.

평택본당은 당시 6대 주임신부인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페티프런 신부가 수녀들과 피난을 떠나고 북한군이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성당 내부가 파괴되고 성물과 시설물들은 도난당했다. 양평본당은 양평읍에 공산군 침공을 막기 위한 유엔군 공군기 폭격이 극심했던 관계로 성당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1946년 왕림본당에 의해 문을 열었던 광성국민학교는 1950년 6월 2일 초등학교가 아닌 준중학교 3년제 봉담고등공민학교로 개교했으나 북한군이 학교와 성당을 점령하면서 임시 휴교했고, 그해 9월 자진 폐교했다. 광성국민학교는 한국민간구조사령부 원조로 1954년 4월 1일 학교 운영을 재개했다.

수많은 교회 시설이 파괴되는 것과 함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박해시대 이래 가장 많은 희생이었다.

남한 일대가 공산군 점령 아래 놓이게 되자 교회는 감시와 탄압 속에 놓였다. 본당 신자들을 지키던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은 체포된 후 살해되거나 행방불명 됐고, UN군 공세로 북한군 전세가 불리했을 때 이러한 상황이 심해졌다.

인적 희생은 수사들의 경우 피해자 전원이 외국인이었고 수녀들도 외국인 피해가 컸다. 사제들은 외국인과 한국인이 반반을 차지했다. 서울대목구와 평양대목구에서는 한국인 신부 희생이 두드러졌다.

남한 지역에서 체포돼 납북된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서울로 집결했다가 평양으로 압송됐다. 조사 후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하창리 수용소에 갇혔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옥사독 수용소에 수감됐던 덕원과 함흥대목구 성직자 수도자들은 북행하며 다른 수용소를 거쳐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돌아와 억류된다. 이 두 가지의 고난스러운 이동과정을 ‘죽음의 행진’이라 부른다. 죽음의 행진과 혹독한 수용소 생활 중에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았다. 중강진에서 병으로 선종한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안성본당 초대 주임신부를 맡았었다.

수원교구지역 본당 주임신부들은 근처 공소로 피신하거나 피란길에 올라 공산군에게 희생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전에서 희생당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중 폴리신부, 몰리마르 신부, 페랭 신부는 수원교구지역에서 활동했다. 북한 지역에서 행방불명된 김경민 신부와 이순성 신부도 수원교구지역 본당주임을 역임한 바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