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9)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3-17 수정일 2020-03-17 발행일 2020-03-22 제 318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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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

안드레아 바니 작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 불리며 ‘중세기에 나타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82~1226). 그의 가치는 최초의 탁발수도회 설립과 함께 800여 년의 역사 속에 교회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1206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태생적으로 많은 재산 덕분에 누렸던 안락한 삶, 가족들과 이별했다. 그리고 가난과 복음 전파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이를 그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 안에서 수행하게 될 역할로 받아들였다. 또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복음 전파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는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깨달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영적 차원의 교회 쇄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이다.

이 무렵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에 감명을 받아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희망하는 ‘첫 동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프란치스코와 첫 동료 12명은 리보토르토(Rivotorto)에서 움막 생활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삶을 따르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이 더 그들의 유일한 생활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209년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복음적 생활양식을 구두로 인준받음으로써 교회 안에 공식적인 수도회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이들은 회개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형제애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작은 형제들’ 수도회로 뚜렷이 확장되고 발전하게 된다.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성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회칙을 최종 승인하는데, 이 회칙이 「인준받은 회칙(Regula Bullata)」이다.

회원 수도 증가하고 평신도 단체인 재속 프란치스코회(O.F.S)도 생겨나는 등 성장을 거듭하던 수도회는 1274년 7대 총장 성 보나벤투라가 선종한 후 내적 갈등의 시기를 맞게 된다.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도시 안에 공동체를 세우고 살아가는 ‘꼰벤뚜알(Conventuali)’ 형제들, 엄격한 가난과 프란치스칸 영성 가운데 은수자적 측면을 강조하는 ‘열성파(Zelanti)’ 또는 ‘영성파(Spirituali)’로 나뉘게 된 것이다.

1517년 레오 10세 교황은 모든 개혁 그룹을 ‘옵세르반티 작은 형제회’ 이름으로 살아가게 했고, 1528년 여기서 ‘카푸친(Cappuccini)’이 개혁돼 다시 분리됐다.

1897년 레오 13세 교황은 이들을 ‘작은 형제회(O.F.M)’이름으로 통합해 살게 했다. 이로써 현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시는 수도회는 꼰벤뚜알 작은 형제회(OFMconv.), 작은 형제회(OFM),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 cap.)가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