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수원교구-용인시 협력한 ‘명품 순례길’ 주요 성지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2-04 수정일 2020-02-05 발행일 2020-02-09 제 318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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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숲길에서 만나는 신앙 선조 이야기

1월 30일 교구는 용인시와 ‘명품 순례길’ 조성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었다. 이로써 은이 성지, 미리내 성지를 비롯한 교구의 유서 깊은 성지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신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순례의 의미가 부각될 전망이다. 이를 계기로 명품 순례길의 주요 성지를 살펴본다.

■ 은이 성지

‘숨은 이들의 마을’. ‘은이’(隱里)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숨은 이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번지를 말한다. 이곳의 바로 이웃에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순교자 성 김대건 신부가 성장한 골배마실 교우촌이 있다. 1836년 입국한 모방 신부는 교우촌을 순방하던 중 성 김제준(이냐시오)의 장남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기 위해 골배마실을 방문했고, 이때 모방 신부가 거처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곳이 은이 마을이다. 이를 통해 은이 교우촌은 공소로 설정됐다.

1845년 사제서품 후 귀국한 김대건 신부는 그해 말까지 한양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교구장 앵베르 주교 허락을 얻어 용인에 살던 모친 고 우르술라와 상봉했다. 이어 1846년 부활 때까지 은이 공소에 머물며 주변 교우촌을 순방했다.

이처럼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성장하면서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며 사제 서품 후에는 사목 중심지 즉 최초의 본당 역할을 한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다.

※문의 031-338-1702

■ 미리내 성지

박해시대 교우촌이었던 이곳은 시궁산과 쌍령산 중심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수 우리말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흩어져 살던 신자들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 불빛과 밤하늘 별빛이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은하수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리내는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와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순교한 성 이윤일(요한)의 시신이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로 이름 붙여지게 됐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미리내로 몰래 옮겨졌다. 당시 17세였던 이민식(빈첸시오)은 파수 군졸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10월 26일,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고 150여 리 산길을 밤에만 걸어서 10월 30일 미리내에서 장사를 지냈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도 여기에 묻혔다. 이윤일 성인의 시신은 성지 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돼 있다가 성인으로 시성된 후 대구대교구로 이장됐다.

※문의 031-674-1256

망덕 고개길.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삼덕 고개

은이 성지에서 미리내 성지에 이르는 길에서는 세 개의 험한 고개 길을 마주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 생전에는 사목 활동에 나섰던 행로였고 순교 후에는 유해가 옮겨진 경로였다. 바로 신덕(信德) 고개(은이 고개), 망덕(望德) 고개(해실이 고개), 애덕(愛德 ) 고개(오두재 고개)다.

1846년 10월 26일 이민식(빈첸시오)은 몇몇 신자들과 함께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돌린 김대건 신부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서 이 길을 넘었다.

망덕 고개에서는 이민식이 호랑이를 만난 일화가 전해내려 온다. 호랑이와 마주친 이민식은 “김대건 신부 유해를 모시고 가는 중이니 썩 물러나라”고 호령했고 이에 호랑이가 길을 비켰다는 내용이다.

애덕 고개에서도 김대건 신부 유해 이장과 관련한 숨은 이야기가 있다. 콩밭에 신부의 유해를 숨겨두었다가 주인에게 발각되기 직전,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려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삼덕 고개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지키고자 했던 옛 신앙 선조들의 목숨 건 여정이 서려 있다.

■ 고초골 공소

제1대리구 원삼본당(주임 이철민 신부) 고초골 공소는 교구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한옥 공소다. 124㎡ 규모의 공소 경당은 2018년 3월 9일 문화재보호법 제53조에 따라 국가 등록문화재 제708호로 등록됐다.

공소는 1820년경부터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뤘던 것으로 여겨진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한양과 해미에서 온 포졸들에 의해 신자들이 잡혀갔다. 기록에서는 신 안드레아와 박 바르바라 등 5명의 순교자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86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다시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미리내본당 관할 공소가 됐다.

전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가 2016년 6월 고초골로 이주하면서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며 공소 내 ‘고초골 피정의 집’에서는 다양한 피정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문의 031-337-0470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