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5) 가르멜 여자 수도원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1-28 수정일 2020-01-28 발행일 2020-02-02 제 318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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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발상지에서 삶 봉헌하고 기도

수도자들이 제병을 제작하고 있다.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 제공

가르멜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39년 7월 이뤄졌다. 프랑스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소속의 맥틸드와 마들렌 수녀가 내한하면서다. 이듬해 1940년 4월 혜화동에서 수도 생활이 시작됐고, 한 달 뒤 다시 3명의 수녀가 입국하면서 인원은 5명으로 늘어났다. 당초 수녀원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국으로부터 원조가 끊어지자 그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대교구로부터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부지 일부를 지원받으면서 수녀원 건립 계획은 탄력을 받았고 1941년 7월 16일 낙성식을 하기에 이른다.

수녀원은 세워졌으나 일제 치하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감시와 조사를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생활고까지 겪으며 초기의 입회자들을 귀가시켜야 하는 어려움에 맞부딪혔다.

해방되고 1946년에는 입회를 기다려오던 지원자 10여 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수녀회는 또다시 큰 시련에 직면한다. 마들렌 수녀는 납치돼 북으로 끌려간 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마들렌 수녀는 「귀양의 애가」를 통해 전쟁과 납치, 죽음 등 당시 외국인 수녀들이 마주해야 했던 참상과 체험을 남겼다. 이들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기도와 침묵으로 죽기까지 그 참혹한 상황을 참아내며 데레사 영성을 완성하고 한국인들의 성화를 위해 기꺼이 씨앗이 됐다.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수녀들은 1953년 다시 혜화동 수녀원으로 귀환했다. 포로 생활 후 본국에서 쉬고 있던 앙리에트 수녀와 마들렌 수녀도 재입국하면서 수녀원은 안정을 찾아갔다.

전쟁 속에서 움텄던 가르멜 영성의 싹은 그 후 부산(현재 밀양), 대전, 천진암, 충주, 고성,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꽃을 피웠다. 아울러 오스트리아 가르멜 수녀들이 대구 가르멜을 창립하였고 이는 상주 가르멜로 이어졌다. 이렇게 현재 한국에 8개, 외국에 1개의 가르멜 수도원이 고유의 영성을 심어가고 있다.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은 수원교구 요청으로 1980년 6월 4일에 설립된 교황청립 봉쇄 관상 수도원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이 지닌 얼을 이어받아 우리 겨레의 복음화와 사목자들의 성화를 위해 자신들을 내어놓는다. 기도와 침묵, 희생, 극기의 샘이 되는 수도 생활을 통해 한국교회에 활력이 넘치는 피를 공급하고 ‘제물의 삶’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별히 기도와 봉사로 제작되는 제병 작업은 8단계 공정 과정을 거쳐 각 본당과 교회 기관에 발송되고 있다. 이런 모든 일과 기도의 지향은 세상 구원이다.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평일미사는 오전 7시에, 주일미사는 오전 7시30분에 봉헌된다. 원하는 이들은 언제든 수도 공동체와 함께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아울러 미사와 개별 면담을 통해 기도 지향을 함께한다. 수도원 측은 “새해에 영성 생활의 진보를 원하는 신자들은 기도하는 것을 습관처럼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보라”고 권했다.

개별 면담은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가능하다.

※문의 031-762-5951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