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가족의 인연을 하느님께로] (1)성 정하상 바오로 가족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9-09-03 수정일 2019-09-03 발행일 2019-09-08 제 316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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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의 신앙 이어받으며 순교 영광 안아
정약종·유조이 부부 가르침으로 신앙에 전념하다 순교한 삼남매
박해 중에도 성직자 영입에 힘써
어머니는 79세에 태형으로 순교, 선교사 돕던 정정혜 성녀도 참수

순교자 성월이 돌아왔다. 하느님의 섭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교회 신앙 선조들은 과거의 질서와 관습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참 진리와 가치에 모든 것을 내어 맡겼다.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복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특별히 가족·혈연관계로 묶여 순교 대열에 선 이들을 여럿 찾을 수 있다. 교구와 연관된 대표적인 순교자 집안을 소개한다.

성 정정혜 엘리사벳, 성 유조이 체칠리아, 성 정하상 바오로(왼쪽부터) 성화.

성 정하상(바오로, 1795~1839) 가족은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 가문으로 꼽힌다.

성인을 비롯한 아버지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 어머니 성 유조이(체칠리아, 1761~1839), 형 복자 정철상(가롤로, ?~1801) 및 동생 성 정정혜(엘리사벳, 1797~1839)가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정약종은 1786년 무렵 중형 정약전(1758~1816)으로부터 교리를 배웠다. 세례 이후에는 교리를 가르치고 연구하며 실천에 몰두했다.

첫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정철상을 아들로 두었으나 얼마 뒤 사별하고 이후 유조이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았다. 유조이는 곧 정하상과 정정혜의 친모가 된다.

양반 출신 지도층으로 제사 문제 등 가문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던 정약종은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이주하는 용단을 내렸다. 이후 지역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최초의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완성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처리했으며 주 신부에 의해 명도회(明道會) 회장에 임명된 후 신앙 공동체 유지와 교육, 선교를 위해 노력하는 등 지도층 신자로 활동했다. 그가 쓴 한글 교리서는 주 신부 승인을 받아 신자들에게 보급됐다. ‘초기 한국교회 교부’로 불릴 만큼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었던 모습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됐으나 문초 중에도 오로지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설파했고, 체포된 지 15일 만에 사형을 선고받아 1801년 4월 8일 순교했다.

복자 정철상 가롤로가 옥고를 치르는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찾아가 음식을 전하고 있다. 그림은 탁희성 화백의 작품.

정철상은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정약종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부친이 체포되자 감옥 근처에 머물며 옥바라지를 했던 그는 정약종이 순교하던 날 체포됐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함구하는 등 교회를 지키며 신앙을 증거했다. 이후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가 5월 14일 부친을 뒤따라 순교의 칼을 받았다.

정약종이 순교할 때 만 6살이었던 정하상은 박해 당시 유조이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됐다. 이후 성가정의 신앙을 이어받으며 모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웠던 그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는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정하상은 성직자 영입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쌓았던 평신도 지도자였다. 또 실천하는 신앙인이자 박해 시대의 참다운 영성가로 평가된다. 올해로 순교 180주년을 맞는 그는 1816년부터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 설정, 1833년 이래 여러 명의 성직자가 입국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주교의 복사를 맡으며 신학생으로 선발돼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했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중단됐다.

그해 7월 11일 가족, 동료와 함께 체포된 그는 이후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를 통해 천주교 견해를 밝히며 박해를 그치도록 주장했다. 엄한 문초 속에서도 나약함을 보이지 않고 굳건한 천주의 신앙을 드러냈던 정하상은 잡히고 두 달여 뒤인 9월 22일 참수됐다.

유조이는 체포 당시 79세 고령임에도 옥고를 치르고 230대 곤장을 맞았다. 당시 법률에 노인에 대한 참수는 금지됐기에 재판관들은 곤장으로 죽이기로 하고 문초를 거듭했다. 많은 나이에 매를 맞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강인한 신앙을 보였던 그는 같은 해 11월 23일 옥 바닥에 누워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를 소리 내어 부르다 숨을 거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최고령 순교자다.

어려서부터 모친으로부터 경문(經文)과 교리를 익혔던 정정혜는 바느질과 길쌈 일로 가족의 생계를 돕고 오빠 정하상의 뒷바라지를 했다. 정하상이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모친과 함께 더욱 신앙생활에 몰두하며 동정을 결심했다. 모방 신부 등 선교사들의 처소를 정성껏 돌봤으며 신자들이 가톨릭 의식과 성사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도 했다.

체포된 뒤 포도청에서 7회의 심문과 320대 곤장을 맞고 형조에서 다시 6회 심문을 받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옥중에서도 기도하며 갇힌 신자들을 격려했던 그는 1839년 12월 29일 부친과 오빠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다.

천진암 성지에는 복자 정약종과 성 정하상의 묘가 모셔져 있다.

태장을 맞고 옥사한 성 유조이 체칠리아. 그림은 탁희성 화백의 작품.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