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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만난 사람]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이수용 할머니

우세민 기자
입력일 2017-08-14 수정일 2017-08-14 발행일 2017-08-20 제 3058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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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 위해 매일 ‘한반도 평화’ 기도합니다”
양쪽 다리 기능 잃고 자궁암 발병
평생에 영향 미친 전쟁과 핵 ‘반대’

72년 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28만 명이 사망했다. 한국인 희생자만 5만 명이다. 그중 대다수가 경남 합천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합천에 강제징용자 또는 생계를 위해 이주한 한국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지난 8월 6일에는 합천에 국내 유일의 원폭자료관이 개관하기도 했다.

광복절을 앞두고 8월 12일 오전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이수용(마리아·90) 할머니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이 할머니는 합천 인근 고령에서 살다 7살이던 1934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다.

“당시 18살이었습니다. 히로시마시 저금국(貯金局) 금융공무원으로 한창 꿈을 펼치려던 때였죠.”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사무실에 막 출근해 일을 시작하려던 그때,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쾅’소리가 났다. 할머니는 훈련 받은 대로 책상 밑에 숨었다. 그리고 충격으로 실신했다. 저금국은 핵폭탄 투하 지점에서 불과 1.5㎞ 떨어진 곳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 몸에 유리창 파편이 박혀 있었고, 바닥은 피바다였습니다. 왼쪽 발등에 큰 유리조각이 박혀 피가 많이 났지만 우선 살아야했습니다.”

할머니는 출혈이 심했지만 밖으로 나가 전찻길을 따라 걸었다. 화창한 날인데도 검은 비가 내렸다. 시내 쪽은 온통 불바다였다. 열풍으로 타버린 시체들을 지나 강둑으로 향했다. 강 건너 군부대 도움으로 할머니는 며칠 동안 간단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아야 했다.

“발등에 박힌 큰 유리조각에 결국 양쪽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됐습니다. 압박붕대 역할을 하는 긴 양말을 신어야만 겨우 걸을 수 있어요. 20년 전에는 자궁암을 발견해 수술 받았습니다. 의사는 방사능 영향일 것 같다더군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고국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몸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50년 만인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가 저금국 근무기록을 바탕으로 원폭 피해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현재는 대한적십자사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할머니는 1996년 모친의 권유로 부산 해운대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뒤부터 신앙은 할머니에게 고통을 이기는 힘이 됐다. “성당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요. 주일미사는 절대 빠지지 않고 매일 기도합니다.”

할머니가 요즘 드리는 기도 주제는 ‘한반도 평화’다.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누구보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할머니는 “무조건 대화로 평화롭게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발전소에 대해서도 “절대 안전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후손들을 위해서는 핵이 없어져야 해요. 우리처럼 전쟁으로 피해 입으면 안 되잖아요. 매일 핵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세민 기자 semin@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