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황주일 특집]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섬긴 ‘주님의 종’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7-06-27 수정일 2017-06-28 발행일 2017-07-02 제 305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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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그리스도를 대리해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교황을 기억하는 교황주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 이후부터 낮은 자를 향한 시선과 겸손, 소통의 행보로 ‘프란치스코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교회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이기주의와 수직적 경쟁구조가 만연한 세태 속에서 사람이 되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을 닮아 몸소 낮은 곳에 가까이 가려는데 대한 울림 때문일 것이다. 교황주일을 맞아 교회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겸허하고 소박한 낮은 모습으로 함께했던 역대 교황들의 자취를 살펴본다.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

■ 굶주리는 이들 위해 식량 마련

오늘날까지 교황들이 사용하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 칭호를 처음 사용한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재위 590-604)은 즉위하자마자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식량과 생필품을 마련하는 등 사회가 겪는 어려움에 적극 함께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부터 시칠리아, 달마티아, 갈리아, 또 북아프리카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교황청의 토지를 다시 정리하는 법령, 즉 베드로 세습령(Patrimonium Petri)을 시행했다. 이 같은 부동산의 재정비는 후일 교황령의 기초가 됐고 중세 때 교황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교황이 된 590년 당시 로마와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의 약탈로 경제가 거의 마비 상태였다. 로마 시내는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그레고리오 1세는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적극 찾아갈 것을 요청했다. 또 가난한 이들이 상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구호소 설치를 지시했다.

매월 구호품 지원을 지속했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구호 식량을 받으러 가기가 여의치 않은 이들에게는 수도자들이 매일 아침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했다. 이들이 먼저 식량을 받기 전에는 먼저 식사하는 법도 없었다. 또 식사 때는 12명의 빈민들을 초대해 함께 밥을 먹었다. 그때 이용한 대형 식탁은 지금까지 보존돼 있다. 그가 작성한 서신에서 어려운 이들에 대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나를 당신 대리자로 삼으시어 힘겨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혼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훌륭하게 완수하면서 ‘대(Magnus)’라는 칭호를 얻은 그레고리오 1세는 수도자로서는 최초의 교황이다.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사목지침서’ 4권을 저술했다. 또 미사 전례곡들과 성무일도에 사용된 시편 등을 전례력에 맞춰 정리한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편찬했다. 중세 교황권뿐만 아니라 교황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성 비오 5세 교황.

■ 즉위 후에도 청빈 겸손의 수도생활 유지

성 비오 5세 교황(재위 1566-1572)과 베네딕토 13세 교황(재위 1724-1730)은 도미니코수도회 출신 교황으로서, 수도자로서의 검소한 생활양식을 교황 자리에서도 삶으로 실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오 5세 교황은 로마가 신앙심이 투철하고 안전한 지역으로 조성되기 위해서는 엄격함과 도덕성 회복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런 배경에서 그는 교황청의 의식주부터 검소하게 변화시켰고 교황즉위식에 들어갈 경비 일체를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했다. 빈민 구제 및 경영이 곤란할 정도로 가난한 수도원 원조에 기부하게 했다.

교황용 제의를 새로 맞추지도 않았고 전임 교황들이 입었던 제의를 그대로 입었다. 교황 복장 속에 수도복을 입고 지낼 정도였다. 때때로 맨발 차림으로 로마 성당들을 순례할 만큼 기도와 고행의 자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와 함께 연고자 등용 금지, 성직자 해당 부임지 상주 거주 의무화, 동물학대 금지, 신성모독 행위 금지 등 조치들을 단행했다. 교황의 검소하고 검약한 생활에 따라 교황청은 도덕과 근면의 모범적인 장소로 부상했다. 그에 힘입어 교황청의 개혁은 최고조에 달했다.

베네딕토 13세 교황.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해 경건한 삶을 요청하며 자신이 몸소 그러한 삶을 실천했던 비오 5세 교황은 전례서 개혁으로 교회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현재의 15단 양식 묵주기도를 제정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베네벤토의 대주교로 봉직하다 교황에 선출된 베네딕토 13세 교황은 대주교 시절에도 평범한 수사처럼 살았을 만큼 검약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수도회 총장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던 그는 즉위 이후 교황청의 화려한 집무실을 사양하고 수도자들이 거주하는 곳에 살며 수도자로서의 생활 방식을 지켰다. 자주 환자들을 찾아 위로했으며 성직자들의 기강을 다잡기 위해 가발 착용 등 추기경단의 사치스런 행위를 비난했다. 소박한 삶의 모습으로 ‘진지한 목자’ 또는 ‘이웃 사랑의 실천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성 요한 23세 교황.

■ 교황직을 현대 세계로 개방

“나는 화려함에 둘러싸여 감옥살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즉위미사에서 ‘좋은 목자가 되겠다’는 열망을 보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재위 1958-1963)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였다. 오랫동안 그의 비서직을 역임했던 로리스 F. 카포빌라 몬시뇰은 “교황님은 겸손함에 있어 위대하셨고, 위대함에 있어 겸손하셨다”고 회고한 바 있다. 군주적인 교황상을 버리고, 교황직을 ‘로마의 주교’라는 사목직으로 변화시키는 등 세계인의 진정한 목자로 자리매김했던 그는 선출 직후 교황 앞에서 무릎 꿇는 관행부터 금지시켰다.

소탈한 성품의 그는 교황직을 현대 세계로 개방하고 공장과 양로원, 감옥을 찾아다녔다. 즉위 후 한 달여 만인 1958년 예수 성탄 대축일, 그는 로마의 가장 큰 교도소인 레지나첼리(Regina Coeli) 감옥을 찾아 죄수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러분이 제게 올 수 없기 때문에, 제가 대신 이렇게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어린이 전문 병원인 ‘밤비노 예수 병원’과 ‘산토스피리토 병원’을 방문했다. 이는 1870년 이후 끊겼던 레지나첼리 감옥과 지역 병원을 방문하는 관례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 교회 안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요한 23세 교황은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인류 전체를 향해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 등을 통해 평화 공존을 역설하고 인류가 직면한 현안 문제 해결에 기여하려 노력했다. 1962년 한국교회의 교계제도를 설정했다. 그해 9월 한국이 수해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순천시에 후원금 1만 달러를 보내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 교황대관식 생략

33일의 짧은 재임 기간을 가졌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1978. 8. 26-9. 28)은 비록 한 달 가량 교황의 자리에 있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고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뜻을 이어받아 현대 세계에 교회를 적응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화려하고 전통적인 교황대관식에서 허례허식을 없앤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6시간에 걸친 기존의 교황대관식 대신 간소한 양식의 교황 즉위 미사로 형식을 바꿨으며, 팔리움을 받는 것으로 최고 목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또 연설문을 담은 공식 문서를 통해 그간 교황 스스로를 ‘짐(朕)이라 부르던 것에서 벗어나 ‘나’라고 지칭했다. 전용 가마인 ‘세디아 게스타토리아(sedia gestatoria)’의 사용도 거절했다.

이탈리아에서 ‘미소의 교황’ ‘하느님의 미소’ 등의 애칭으로 불렸던 요한 바오로 1세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이중 이름인 ‘요한 바오로’를 선택했다. 요한 23세의 선함과 바오로 6세의 엄격함을 닮고 싶다는 의미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 일반인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교황

‘평화의 사도’ ‘행동하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재위 1978-2005)은 전임자가 택한 이중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뜻을 전승받고 싶어했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을 계승하겠다는 메시지였다. 같은 배경에서 전임 교황처럼 전통적인 대관미사 보다 소박한 즉위미사를 봉헌했다.

교황이 되자마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가장 먼저 찾았던 그는 1979년부터 2004년까지 104번에 걸쳐 사도적 순방에 나섰다. 방문하는 지역마다 어린이 장애인 등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찾아 하느님의 위로를 전했다. 1984년 한국 방문 때에는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들을 축복했다. 이런 면에서 “교황청을 벗어나 여러 나라를 돌며 일반을 만난 교황, 일반인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교황”이라는 평이 나온다.

그는 ‘냉전 시대’에 대립과 대결의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처음으로 공산국가인 폴란드를 방문했다. 또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을 이뤄냈다. 이 같은 행보는 인류의 평화 화합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였고, 실제 공산주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재위기간 중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비롯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구현에 바탕을 둔 많은 문헌을 발표했다. 1984년 103위 시성식과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참석차 두 차례 방한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