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저를 보내주십시오] 함제도 신부(상)

이형준
입력일 2024-04-01 수정일 2024-04-08 발행일 2024-04-07 제 338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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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활 64년…이 땅과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게 됐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는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의 노력과 사랑이 뒷받침돼왔다. 교회 곳곳 다양한 사목 분야에서 섬김과 사랑의 사명을 실천하며 교회 성장의 디딤돌이 된 외국인 선교사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며 낯선 이국땅을 찾아 지금도 바로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선교사들. 그 자체로 한국교회의 역사인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새 기획 ‘저를 보내주십시오’의 첫 주인공은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 신부(Gerard E. Hammond·90)다.

■ 사제의 길이 가장 좋은 몫

함제도 신부는 1933년 8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미국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웠지요. 부모님도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담배 가게에서,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일하셨습니다.”

독실한 신자 가정에서 자란 함 신부는 어린 시절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자연스럽게 사제 성소를 키웠다. 함 신부는 “집안에 교구 사제가 두 분이나 계셨고 나를 가르친 메리놀 수녀회 수녀님도 ‘사제의 길이 가장 좋은 몫이다’라고 하셔서 점차 사제가 되고픈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1947년 9월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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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품식 후 찍은 가족사진.  사진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제공

■ 짝꿍 장익과의 인연 그리고 선교 희망지는 1·2·3지망 모두 “코리아!”

함 신부가 태평양 너머 낯선 한국을 알게 된 것은 고(故) 장익 주교(십자가의 요한·1933~2020)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소신학교에서 장익 주교와 짝꿍으로 만나 절친이 됐다”며 “오랜 시간 함께 하며 한국을 잘 알게 됐고, 그는 나에게 한국 선교를 권유했다”고 회상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행에 대한 열망이 피어났다.

한국과의 인연은 신학생 때도 이어졌다. “메리놀 대학교 신학생 시절, 1920년대부터 북한에서 선교하다 일제에 의해 추방된 메리놀 신부들에게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그는 “장익 주교와의 인연과 신부님들에게 들은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 선교를 결정한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사제품을 받은 후 함 신부는 메리놀회 총장 신부와의 파견지 결정을 위한 면담에서 한국행을 강력히 희망했다.

“1·2·3지망 모두 ‘코리아’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총장님은 교회가 지명하는 곳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어쨌든 전 한국 가고 싶습니다’라고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함 신부의 바람대로 한국행이 결정됐다. 그렇게 희망했던 나라로의 파견이었지만 막상 가족과 헤어지는 날 밤, 온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함 신부는 당시를 ‘너무나 슬퍼 잊을 수 없는 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가족은 제가 좀 더 곁에 머물기를 바랐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젊을 때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 생각했다”고 전했다.

한국으로의 여정은 무려 3주가 걸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화물선을 타고 일본, 부산, 인천까지. 인천에 도착해서 다시 트럭을 타고 메리놀회 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위가 한창이던 1960년 8월이었다. 함 신부는 초대 청주교구장 제임스 파디(야고보·1898~1983) 주교의 비서로 한국에서의 사목을 시작했다.

■ 낯선 타향살이 어려움도 잠깐… 한국에 대한 호기심 키워나가

모든 것이 낯선 한국에서의 처음은 무척 고됐다. 함 신부는 “사제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당시엔 6개월만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과 소통하며 점차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자리 잡았다. 함 신부는 “집에 들어갈 때 지켜야 할 예의나 식사 예절 등 한국의 풍속을 하나하나 익혀 나갔고 특히 존댓말 문화가 인상 깊었다”고 기억했다.

“아이들에게 약간은 어눌한 존댓말로 ‘진지 잡수세요~’ 하면 모두가 막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한국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황이었다. 함 신부는 “시골뿐 아니라 수도 서울마저도 밤에는 전기가 부족해 어두컴컴한 날도 잦았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청주교구도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함 신부는 신부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사제관의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간혹 파디 주교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함 신부는 “주교님은 선교를 왔으니 한국인들과 똑같이 생활하기를 바라셨다”며 “자전거를 사고 싶다고 하자 한국인들보다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며 혼내셨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디 주교와의 인연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함 신부는 “지금도 너무 보고 싶을 때면 주교님 묘를 찾아가 인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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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사목 생활 중 병자성사를 주는 모습. 사진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제공

■ 지금도 웃음 짓게 하는 에피소드… ‘묵주’ 기도 잘못 발음해 “맥주 꼭 하세요~”

함 신부는 이후 청주교구 북문로본당, 수동본당, 괴산본당에서 사목했다. 본당신부로 사목하던 시절도 갖가지 일화가 가득했다. 그는 “고해성사를 주다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묵주기도가 아닌 ‘맥주’를 꼭 하라고 보속을 줬다”며 “남자 신자들에게 소문이 퍼져 그 뒤로 내게 성사 보러 오는 줄이 길어졌다”며 웃었다. 지역에 오일장이 열리면 시장을 직접 찾아 ‘장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또 공소를 찾아가며 신자들과 소통하기를 즐겼다. 그는 “이 시절 소주와 삼계탕, 특히 삼계탕을 참 많이 먹었다”고 전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길래 삼계탕이라 했더니 가는 공소마다 삼계탕을 주셨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삼계탕만 먹은 적도 있습니다.”

■ 선교는 로맨스…“선교사는 인간답게 사랑해야!”

함 신부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을 사랑하게 됐고, 한국인과 똑같아지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책에서 이미 언급했던 ‘선교는 로맨스다’라는 말을 되새겼다.

“로맨스는 인간다움을 뜻합니다. 인간의 삶은 곧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곧 선교사도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며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함 신부는 “청주교구는 내 마음의 고향”이라며 깊은 애정을 표했다. 선교 초기 타지 생활의 어려움 속 벗어나고 싶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떠나기 싫은 집이 됐다.

이형준 기자 june@catimes.kr